본보는 지난 2023년 12월부터 2025년 2월까지 연중기획 ‘다시 돌아보는 효자, 열녀비’를 통해 13회에 걸쳐 총 31곳의 효자·열녀비에 담긴 내용을 다시 소개했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본지에 기고했던 고 함종혁 선생의 글을 토대로 효자·열녀비를 다시
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하늘도 감동한 부자지간의 효행 ‘양세정효비’ 경주 시내에서 내남면 방향 삼릉을 지나자 마자 도로 좌측편에 양세효자비(兩世孝子碑)가 세워진 한옥 구조의 비각이 있다. 이곳이 월성김씨 수만, 상태 부자의 효행이 담긴 양세효자각이다. 이 비에는 가선대부 예조참판 월성김공 수만지비(嘉善大夫 禮曹參判月城金公 壽萬之碑)와 동몽교관 조봉대부 월성김공 상태지비(孝子贈 童蒙教官 朝奉大夫 月城金公 相兌之碑)라는 비문에 새겨져 있다. 비문에 따르면 수만 선생은 예법을 존중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받아 행동거지가 올바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부모님 섬기는 일에 정성이 남달랐다. 맛 좋은 음식과 다과를 보면 반드시 부모님께 드렸고, 커서는 어버이를 극진하게 모시는 마음을 으뜸으로 삼았다.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으로 어버이를 편안하게 모셨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병에 들었다. 아버지가 겨울철에 포도가 먹고 싶다고 하자 병을 고치려는 일념으로 동지섣달 추운 눈 속에 포도를 구하러 다니는 정성을 보였다. 하지만 제철이 지난 겨울에 포도를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려는 효심을 하늘이 알았던지 하루는 날아가는 까마귀가 포도 한 송이를 물고 와 땅에 떨어뜨리고 가더라는 것이다. 이 포도를 병석에 있는 아버지에게 드렸더니 그만 병석을 털고 일어났다. 수만 선생의 아들 상태도 아버지의 효심을 본받아 남달리 효심이 지극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니 엄동설한 추운 겨울에 형산강 상류인 앞 냇가의 얼음을 깨고 잉어를 낚아 어머니를 봉양했다. 이 같은 효심에 범도 감동했는지, 어느 날 밤 범이 개를 물고 와서 입 마당에 던져 주고 갔다고 한다. 아들 상태는 하느님이 내리신 효약으로 알고 개를 푹 다려 어머니를 봉양하니 병환이 언제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바로 쾌차했다. 또한 이들 부자는 예의범절을 주문공(朱文公) 가례를 따른지라 많은 선비들이 이들이 효행을 나라에 진정했다. 이에 1861년 조선 철종 임금이 양세효자로 정려(旌閭)했다. 1800년 문중에서 높이 95cm, 넓이 35cm, 두께 14cm의 양세효자비와 비각을 세워 이들 부자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자신의 피로 어머니 살린 ‘효자 묵암달성서공정려비’ 경주에서 포항으로 가는 7번 국도 강동면 호명리 구간 도로 옆에 한옥 목조의 정려각이 보인다. 주유소 못 미쳐 도로변에 위치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이곳에 효자비가 있다. 효자 묵암달성서공정려비(孝子 黙菴達城徐公旌閭碑)다. 효자 서 씨는 달성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엄격한 가정에서 충효 사상을 배우며 자랐다고 한다. 무엇보다 효성이 지극했는데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삼년상을 어른들과 함께 지냈다. 그리고 어머니를 30여년 동안 하루같이 봉양해 장수를 기원했다. 하지만 어느날 어머니가 병에 들어 위독하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나오는 피로 어머니에게 수혈했다. 이 같은 서 씨의 효심을 하늘이 알았는지 어머니가 회생했다. 그 후 4년을 더 살다가 어머니의 병이 재발하자 또다시 손가락을 끊어 수혈시켜 다시 4년간을 연명시켰다. 하지만 지극한 정성에도 결국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장례 후에는 어머니 묘소까지 20리길을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성묘를 다녔다고 한다. 이 같은 서 씨의 효행을 나라에서 알게 되자 이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정려(旌閭)를 내렸다. 1938년 달성서씨 문중에서 유학 월성 손영흔의 글을 받아 호명리 238-1번지에 정효비를 세우게 됐다. 충·효·열 행적 담긴 ‘이씨삼강묘비’ 본지가 강동면 소재 효자·열녀비를 찾아 나서던 중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의미 깊은 비각을 만날 수 있었다.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씨삼강묘비(李氏三綱廟碑)다. 강동면 다산리 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비각으로, 비문에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이희룡 장군과 그의 아들 이문진 및 며느리 김씨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비에는 그들의 충(忠)·효(孝)·열(烈)의 행적이 담겨있다. 이희룡은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까지 호위했으며, 영남의 적을 정찰하라는 왕명을 받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충주에서 적을 만나 전사했다. 아들 문진은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려다 신령에서 적과 대치하다 죽었다. 며느리 김씨가 이 소식을 듣고 손수 시신을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3개월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같은 충·효·열의 깊은 뜻을 전해 들은 나라에서는 이들의 공을 기려 조선 숙종 36년(1710)에 벼슬을 올려주고 정려각을 하사했다. 비는 네모난 비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려놓았다. 비교적 큰 규모이나 별다른 무늬는 두지 않았다. 영조 42년(1766)에 비를 세웠으며, 대제학 남유용이 비문을 짓고, 경주부윤을 지내던 홍재가 글씨를 썼다.
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삼효자 월성김공지비(三孝子 月城金公之碑) 경주 시내에서 오릉 주차장 입구에 이르면 도로 왼쪽에 토담으로 된 한옥 고가가 있다. 고가 앞에는 삼효각(三孝閣)이라는 안내판이 있어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목조기와의 대문을 들어서면 널따란 마당 동편에 목조와가로 된 잘 정비 보존된 비각이 있다. 이 비각이 월성김씨 삼형제의 효행을 기리는 삼효비(三孝碑)를 보호하고 있다. 안내판에는 ‘경주 김씨 문중의 육대조이며 병조판서 충암공 귀일의 손자이신 응벽·응규·응정(應壁·應奎·應井) 삼형제의 지극한 효행을 왕명으로 건립한 비각이다’고 기록돼있다. 비문에 따르면 삼형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시신을 묻은 채 자신들은 비바람과 눈서리를 피해 편안히 집으로 돌아설 수 없어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 꿇어 앉아 시묘(侍墓)에 비바람과 눈서리에도 중단함이 없었다. 묘에 예를 올릴 때는 항상 섬돌 위에서 곡을 하였다 한다. 그래서 삼형제가 밟고 디딘 섬돌이 뚫어져 깊이가 몇치나 되었다고 한다. 어느 여름날 저녁 뇌성우가 치며 비바람이 크게 일고 문득 소리가 나자 삼형제는 머리와 귀를 모으고 들으니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온 듯했다. 깜짝 놀라 움막 밖으로 나와 보았으나 보이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뒤 또다시 소리가 나서 이상히 여겨 신주(神主, 위패)를 껴안고 움막 밖으로 나왔는데 갑자기 움막의 북쪽산이 좌우로 무너져 내려 삼형제가 거처하던 움막을 덮쳤으나 삼형제는 무사했다. 이는 삼형제의 지극한 효행에 하느님과 조상이 돌봄이 있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삼형제는 신춘(神春)이라는 개를 길렀는데 집 소식을 알고 싶으면 편지를 써서 개의 목에 달아 집으로 보내면 개는 능히 그 뜻을 알고 삼형제의 집을 왕복했다. 집에서도 글을 써서 삼형제에게 소식을 전하는 등 집과 묘 사이를 왕래하는 심부름을 맡아 했다. 이 개 또한 영리함에 앞서 삼형제의 지극한 효행에 감동했으리라. 3년이 지나 상복을 벗고 집에 돌아와서도 아침저녁으로 좋은 음식과 의복을 갈아 입지 않고 계속 조상의 사당뵙기를 종신토록 했다. 이 같은 삼형제의 출중한 효행은 널리 알려졌다. 후일에 명종이 삼형제의 행적을 알게되면서 명종 16년(1561년) 효자 정려를 내렸다. 또 이들의 효행을 널리 알리고 귀감을 삼기 위해 삼효자각(三孝子閣)을 건립했다. 효자월성김공휘인학정려비(孝子月城金公諱仁學旌閭碑) 경주시 진현동 중리마을에 깨끗하게 정비·관리되고 있는 목조기와의 비각이 있다. 효자월성김공휘인학정려비(孝子月城金公諱仁學旌閭碑)다. 비문에 따르면 효자 김공(金公)은 정조 22년(1798년)에 태어나 월성최씨 재택(在擇)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김공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남달리 어질고 섬김을 알아 한시도 부모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부모님 앞에 나아가고 물러감과 말씀에 대답도 모두 부모님의 뜻을 따라 기쁘게 했다. 공은 연일군에 살았는데 자라면서 집안이 극히 어려웠다. 그렇지만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고, 시간이 날 때는 장작을 팔아 쌀·고기 등 맛있는 음식을 사서 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했다. 김공의 효행에 대한 소문은 인근 고을에까지 전해져 그를 칭송하는 일이 그치지 않아 좋은 본보기가 됐다. 하루는 아버지와 함께 집에서 키우는 소등에 나무를 싣고, 또 자신이 등짐을 지고서는 성내에 있는 장에 갔다. 나무를 팔아 부모님이 즐겨 먹는 생선과 양곡을 사서 소등에 얹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을 뒷산 고개에 이르자 난데없이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앞에 나타나 아버지를 해치려 했다. 기겁을 한 김공은 소의 코뚜레를 풀어주고 성을 내어 고함치기를 “너는 산군(山君)이니 부자의 예절을 알 것이다. 나의 부친을 해치지 말고 원컨대 내 몸으로 대신하거라”고 꾸짖었다. 이어 호랑이를 잡고 때리며 구르며 죽음을 각오하고 아버지를 구원했다. 같이 간 소도 주인이 해를 당함을 보고 怒號(노호, 성내 소리 지름)하며 범에 달려 들어 뿔로 받고 발로 차 마침내 호랑이를 물리쳤다. 그 소는 집으로 달려가 방황하며 슬피 우니 이에 놀란 집안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보니 소가 왔던 길로 다시 달려갔다. 집안사람들이 소를 쫓아 현장에 가니 아버지는 무사하나 아들 김공은 이미 피투성이가 된 채 숨져 있더라는 것이다. 이를 들은 사람들은 ‘오호라! 비록 소가 말 못하는 무지한 미물이나 주인의 효성에 음직여 의를 본받음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로다’ 했다. 이 일이 널리 알려져 가히 특별한 글을 쓸만한 것으로 사림(士林·선비)에서 글을 써 올리니 정조 임금께서 상으로 김공에게 효자로 정려했다. 또 소에게는 먹이를 내리는 한편 소를 팔지 못하도록 했다. 연일군 오천에 있는 김공과 소의 무덤을 월성김씨 문중에서 1967년(丁未) 경주시 진현동 중리마을 현재 위치에 효자각을 옮겼다. 현손 김원극이 비문을 쓰고, 높이 143cm, 넓이 46cm, 두께 23cm의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충효각에서 200m 떨어진 토함산 서쪽에 김공과 소의 무덤을 나란히 이장해 역사에 전하게 해 무릇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보게 하였다. “효는 곧 오륜의 으뜸이고 백행의 근원이니 이 어찌 중하고 크지 않겠는가?” 이 비각은 지난 2015년 후손들이 개축을 통해 현재 깨끗하게 관리되면서 김공의 효 사상이 한층 더 빛을 발하고 있다. 이상욱 기자 lsw8621@hanmail.net
조손(祖孫) 간의 남편에 대한 열행 전해 내려와 -열부유인충주지씨·영산신씨 양세정려각(烈婦孺人忠州池氏·靈山辛氏 兩世旌閭閣) 경주시 충효동 문화중·고교를 지나 야척마을로 들어서면 왕복 2차선 도로 왼쪽에 아담한 한옥 목조 건물의 비각이 있다. 이 비각 내에는 열부유인충주지씨(烈婦孺人忠州池氏)와 열부유인영산신씨(烈婦孺人靈山辛氏)조손 간의 비석 2기가 자리하고 있다. 왼쪽 비는 열부유인지씨정려각(烈婦孺人池氏旌閭閣), 오른쪽 비는 열부유인신씨정려비(烈婦孺人辛氏旌閭碑)라는 비문을 새겨 이들의 효행을 전하고 있다. -열부유인지씨정려각 열부유인지씨정려각의 주인공인 지씨 부인은 지석절(池錫浙)의 딸로 태어나 평해(平海) 황치술(黃致述) 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삼종(三從)의 도를 지키면서 치밀하게 계획해 밤마다 길쌈을 하며 재산을 모았다. 또 진심으로 남편을 내조하며 착한 배필이 되어 현모양처로서의 삶을 살았다. 황씨 집안은 평해고족(平海 古族)으로 대대로 상조(上祖)는 봉군(封君) 받고, 중조(中祖)는 조관(朝官)으로 좋은 가실(家室)을 이뤘다. 중년에 들면서 액이 있어 남편이 병이 들었다. 지씨 부인은 남편을 살리기 위한 마음이 간절하니 산도 가히 뚫고 돌도 가히 통하는 법, 정신이 일도에 무엇이 구애되랴. 이 비의 비문에는 지씨 부인은 남편을 위해 ‘흰 칼날 들이대어 자신의 허벅다리 살점을 베어내고, 좌우의 다리를 한번 베고 두 번 벤다’고 기록했다. 이어 ‘선혈이 흘러내려 선약같이 떨어지니 귀신이 감동하고 천리가 도운지라 남편은 부인 정성 의뢰하고, 부인은 열녀되니 저 하늘 크게 밝아 그 절개 감격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부인의 정성에도 남편은 1934년 사별했다. 부인은 손수 옷을 지어 여한 없이 남편을 보냈다. 그후 1971년 지씨 부인도 남편 따라 죽으니 살아서는 한 집이요, 죽어서는 같은 무덤에 안장됐다. -열부유인신씨정려비 열부유인신씨는 지씨 부인의 손자 며느리다. 신씨 부인은 승지(承旨) 신상동(辛尙憧)의 후손인 덕술(德述)의 딸로 태어났다. 천성이 총명해 어버이의 뜻에 어긋나지 않았고, 항상 규문(閨門) 안에 거처하며 음식, 길쌈, 바느질 등 부녀자가 할 일을 잘 익혀 한 사람이 능히 백 가지 공부를 다했다고 한다. 또한 단아해 가히 내칙편(內則篇)에 편입될만했다고 전한다. 신씨 부인은 16세 때 평해황씨 가문인 황백운에게 출가했다. 열부 신씨가 들어온 이후부터 황씨 가문은 더욱 복운이 온 집안에 가득해 상하가 휘황하게 빛나니 종친과 인척이 모두 칭찬해 가히 집안의 창성을 기대하게 됐다. 하지만 이 무슨 액운인지 남편이 병이 들어 몇 달이 지나도록 약효가 무효하고, 마침내는 생명을 구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신씨 부인은 능히 손가락을 끊어 선혈을 남편 입에 드리우고 기절했던 남편을 되살리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뜻하지 않게도 4일을 연명한 후 마침내 운명하고 말았다. 열부는 실올 같은 한 생명을 따라 죽기를 이미 마음 속에 결정했다. 그리고 손수 남편의 염습과 장례를 마친 후 밤빛을 틈타 스스로 칼을 꺼내 자결을 하려 할 즈음 가족에게 발각됐다. 이어 음식을 전폐하고 이로 인해 병이 되어 백방으로 간호했지만, 시부모를 봉양하는 도리에 어려움이 있는지라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할 수 없다고 느꼈다. 결국 자기가 죽은 후의 일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겨 벽에 붙이고 간수를 마시고 남편이 죽은 지 7개월 만에 순절했다. 당시 나이는 17세였으니 결혼한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이 같은 지 씨 할머니와 손부 신 씨의 열행은 東康讀誌差之 2㤠友便(동강독지차지 2열우편) 문헌에 기재됐다. 이후 1989년 5월 높이 186cm, 너비 45cm, 두께 20cm의 비신에 月星 李鍊代(월성 이연대) 씨의 비문을 받아 김형진(金亨鎭) 씨가 새긴 열녀비와 비각을 세워 이들의 열행을 지금까지 기리고 있다. 극진한 효성에 눈먼 어버지 눈 뜨게 해 -효자성균진사월성최공지비(孝子成均進士月城崔公之碑) 경주시 내남면 소재 내남초등학교에서 서쪽 200여m 지점 논 뒤편에 말끔히 단장된 한옥 건물의 비각이 있다. 효자성균진사월성최공의 정효비(旌孝碑)다. 효자 최씨는 월성인으로 문창후(文昌侯)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15세손이다. 그는 아버지가 눈에 병이 들어 앞을 보지 못하자 명의를 찾아 약을 구하러 다녔다. 하지만 그 정성에 보람도 없이 아버지는 영영 눈이 어둡게 되자 출입을 할 때 손을 잡고 안내하며, 음식을 드실 때는 수저로 떠드리는 등 마음과 몸에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최씨는 평소에 과거에 급제할 것을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의 소원을 성취해드리기 위해 과거에 응시하고 돌아왔다. 그때 아버지는 “네가 과거에 급제했느냐”하고 물었다. 최씨가 “예. 급제했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아버지는 크게 감격해 일어나는데 두 눈을 갑자기 뜨게 됐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모두 그 효성에 감동해 이뤄진 것이라 했다. 효자 최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이조 때 비각이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 동안 퇴락이 심해 1988년 중건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자신의 살 도려내 남편 살린 열부 이야기, 영일정공시홍지처 열부김해김씨정려비 경주시 내남면 박달리 괘전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살을 도려낸 열부 이야기가 담긴 비(碑)가 있다. 영일정공시홍지처 열부김해김씨정려비(迎日鄭公時洪之妻 烈婦金海金氏旌閭碑)다. 이 비에는 열부 김해김씨 신기(新基) 부인의 남편에 대한 존경과 희생이 새겨져 오늘날의 교훈으로 전해오고 있다. 김씨 부인은 광무제(고종) 때 판임관 정시홍의 아내다. 김씨 부인은 어릴 때부터 엄격한 가정에서 마음 착하게 자랐다. 특히 효심이 강해 착한 어린이라는 말이 이웃을 통해 관청에까지 널리 알려져 주위 모든 사람들이 크게 탄복했다고 한다. 김씨 부인이 17세 되던 해 영일정씨 집안으로 출가했다. 이후 시부모님을 정성을 다해 봉양해왔다. 그러던 중 남편이 뜻밖에 당시의 유행병이던 학질에 걸려 몸져 눕게 됐다. 그러자 김씨 부인은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하늘과 같은 내 남편의 목숨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허벅다리 깊은 살을 칼로 잘라 푹 달여 먹였다. 남편에게는 학질에 특효약이라고 속이고 자신의 살을 달여 먹게 한 것이다. 그렇게 먹인 것이 효험이 있었고, 남편은 오랜 병석을 털고 일어나게 됐다. 이 같은 소문은 입소문을 타고 이웃으로 번져 관이 알게 됐다. 당시 내남면의 관리(내남면장)는 보고서를 올리면서 이 같은 훌륭한 효행은 포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현감은 자신의 살을 베어 달여 남편에게 보약이라고 먹여 사경을 헤매는 남편을 되살아나게 한 사실을 적은 상소를 조정에 올렸다. 상소를 보게 된 황제는 김씨 부인을 열부로 판정하고, 극진히 치하했다. 광무 8년(1904년)에 나라에서 청동과 고기를 하사했다. 또 교지를 내려 남편인 정시홍을 판임관(判任官, 고종 시절 7품~9품)으로 승진시키고, 열부 김씨는 숙부인(淑夫人)으로 교시했다. -고종 정려 후 90여년만에 정려비 세워 이 정려비는 지난 1992년 8월 10일 비가 세워진 이 자리에서 제막식이 열렸다. 당시 김재완 경주군수를 비롯해 군향조사연구회장 김석호 씨 등 1000여명의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개최하고, 김씨 부인의 열행을 기리는 추모식도 가졌다고 한다. 정려비가 당시 고종의 열부 판정 이후에도 90여년이 지난 뒤 세워진 이유는 이렇다. 기록에는 김 숙부인이 돌아가신지 4대 100여년이 지나는 동안 대동아전쟁, 10·1폭동, 6·25전쟁과 화재 사건 등 파란곡절을 많아 열부비 건립을 생각조차 못했다. 그러다 1987년 경주군 향토사연구회장 김석호 씨가 군사(郡史) 편찬을 위해 자료를 조사하던 차에 광무 5년(1901년) 국왕이 내린 열부정려에 대한 교지를 발견하면서 비 건립에 원동력을 찾았다. 당시 경주군과 열녀 후손, 향토문화연구회 등은 현 사회상이 물질문명에만 치우치고 윤리도덕이 퇴보할 뿐 아니라 인도에 위배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해 부부간 윤리도덕과 청소년들의 생활지도 자료로서 교훈이 될 것으로 의견을 같이했다. 이에 따라 경주군의 유적보존비 285만원을 지원 받아 3층으로 된 기단 위에 높이 5척, 너비 2척의 오석으로 된 정려비를 세우게 됐다고 전한다. 남편 잃은 슬픔 딛고 시아버지 정성으로 모신 열부, 효열부증숙부인월성이씨지비 경주시 건천읍 화천리 백석암 입구를 지나 내남면 부지리 방향 200여m 지점 도로 우측에 한옥 구조의 아담한 비각이 나온다. 이 비각 속 비는 남편을 잃어버린 슬픔 속에서도 시아버지를 위로하고 지극정성으로 모신 효부 이야기가 담긴 효열부증숙부인월성이씨지비(孝烈婦贈淑夫人月城李氏之碑)다. 이씨 부인은 월성인으로 유교인 엄격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품은 곧고 유순하며 하는 일이 자상한데다 예법을 존중하는 부덕(婦德)을 익힌 현숙한 부인이었다. 월성인 최상악(崔尙岳) 씨와 결혼했다. 두 부부는 정성을 모아 늙으신 시아버지를 성의를 다해 봉양해왔다. 그러다 남편이 괴질에 걸려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씨 부인은 남편의 죽음에 너무나 어이가 없어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소생한 이씨 부인은 자신의 슬픔을 삼킨 채 오히려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시아버지의 아픔을 위로했다. 이씨 부인은 시아버지에게 “이미 죽은 사람은 다시 생각하지 마시고 억지로라도 음식을 드시어 저로 하여금 의지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했고, 시아버지를 오랫동안 지성으로 받들어 모셨다. 이 같은 이씨 부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945년 8.15 해방 다음해인 1946년 효열부비(孝烈婦碑)를 세웠다고 전한다. -효자 있는 집안에 효자 난다 이씨 부인의 효행은 이를 보고 배운 아들에게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효열부 이씨 부인의 아들 최덕수 또한 어머니의 엄한 가정교육을 받아 공부도 열심히 해 종2품에 올랐다. 특히 부모를 모시는 효성은 어머니 못지않게 지극했다. 이 때문에 아들 또한 효자로 이름났다고 전해진다. 1992년 12월 14일자 본지 147호에서 함종혁 선생은 이씨 부인과 아들 최씨에 대한 후기를 덧붙였다. 함 선생은 이씨 부인의 효행에 대해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평범한 진리는 외면하지 않는다”고 했다. ‘효자 있는 집안에 효자 나고 열녀 있는 집안에 열녀 난다’는 이 평범한 진리를 바꿔말하면 핵가족제와 산업사회로 이기주의가 팽배한 요즘 청소년들의 각종 범죄 증가와 탈선행위는 삼강오륜 등 윤리관이 퇴폐한 데 기인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가정이나 사회나 공동책임의식을 갖고 백년대계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윤리교육에 치중해 아름다운 미풍양속을 지키며 평화로운 사회건설을 이룩하는데 다 함께 노력해야 되겠다”고 강조했다.
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남편의 명(命)을 대신한 열부(烈婦), 효열의인광주노씨정려비(孝烈宜人光州盧氏旌閭碑) 경주시 건천읍 용명리 1762-2번지에는 1980년대 새로이 단장한 한옥구조의 효열각이 있다. 이 비각이 바로 효열의인광주노씨정려비(孝烈宜人光州盧氏旌閭碑)다. 동경통지에 따르면 노씨는 파평 윤두환의 처로, 나이 40세가 넘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여자가 남의 집안에 들어가 대를 이어주지 못하는 것을 큰 죄로 생각한 노씨 부인은 항상 통탄해하면서 남편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 가난한 가운데 홀로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극진한 효성을 다해 보양해오던 중 남편 윤씨 마저 병이 들어 누웠다. 그러자 노씨는 겨울 엄동설한에 두꺼운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아 식사를 올리는 등 시어머니와 남편을 정성을 다해 봉양해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성 가득한 간호에도 아랑곳없이 남편의 병은 차도가 없이 운명 직전에 이르렀다. 노씨 부인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죽어가는 남편의 입에 수혈했다. 이로 인해 남편이 잠시 깨어났다. 이 같은 정성에도 얼마 후 남편이 숨을 거두게 되자 노 씨는 남몰래 뒤뜰로 돌아가 자결을 결행했다. 이를 본 집안사람들이 놀라 노씨 부인을 부둥켜안고 방으로 들어가니 뜻밖에도 남편이 죽지 않고 소생해 있었다. 하지만 노씨 부인은 숨졌다. 소생한 남편 윤 씨는 숨진 부인 노씨를 어루만지며 곡하여 이르기를 “조금 전 부인이 저승으로 나를 따라와 나의 손을 잡고 울면서 내가 그대의 명을 대신했으니, 그대는 다시 세상에 나가서 새로 배필을 얻어 자손을 잇게 하소서”라며 슬퍼했다. 그 후 윤씨는 재취 장가를 들어 아들 3형제와 10여명의 손자를 두어 가문의 대를 잇게 됐다. 이 같은 노 씨 부인의 파평윤씨 가문을 빛나게 한 효열(孝烈)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은 1980년대 이곳에 정려비와 효열각을 세웠다. 후사를 잇고 남편 따라간 열부 하씨, 부사인손희천처진양하씨지각(烈婦士人孫喜天妻晋陽河氏之閣) 경주시 광명동 379-6번지에는 2동의 비각이 있다. 그중 서쪽 비각이 열부사인손희천처진양하씨지각(烈婦士人孫喜天妻晋陽河氏之閣)이다. 하 씨는 월성손씨와 결혼해 신행을 가기도 전에 남편의 병 소식을 듣고 급히 시댁으로 달려 갔으나 이미 남편이 숨진 뒤였다. 하씨 부인은 남편을 따라 같이 죽으려고 결심했으나 임신한 몸으로 남편의 후사를 이어주기 위해 결행하지 못했다. 이후 산달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 하씨는 아들이 능히 죽을 먹고 혼자 살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고, 또 어머니가 없어도 자랄 수 있음을 확인한 뒤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씨 부인은 남편과 같이 묻히게 됐다. 이러한 열부의 행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짐에 따라 조선 순조 3년(1803년)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이에 월성손씨 문중은 비와 비각을 세워 하씨 부인의 열행을 기렸다. 1992년 경주시는 퇴락이 심한 비각의 담장을 새로이 보수했으나 비각 안에 있어야 할 비신(碑身)이 언제인지도 모른채 없어지고 텅 빈 비각만 남았다. 하씨 부인의 행적을 기록한 현판만이 전해지고 있어 비각을 찾는 사람들을 쓸쓸하게 하고 있다. 어머니 눈을 뜨게 한 효자 김두망, 효자절충김두망지비(孝子折衝金斗望之碑) 진양하씨지각 동편에 있는 비각이 효자절충김두망지비(孝子折衝金斗望之碑)다. 효자 김두망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나이 20세가 되도록 앞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께 아침저녁으로 3년 동안 식사를 손수 지어 먹이는 등 수발을 하며 정성으로 섬겨왔다. 김두망은 밤낮으로 천지신명께 ‘저의 눈은 멀게 할지라도 어머니의 눈만은 뜨게 해달라’고 빌어왔다. 하루는 하늘이 감동해서인지 어머님이 다시 눈을 뜨게 됐다. 어머니 그 후 10여년 동안 밝은 세상을 보면 즐겁고 행복하게 생존하시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 뜻을 후세에 길이길이 전하기 위해 헌종 17년(1837년) 효자로 정려하고 광명리에 월성김씨 문중으로 하여금 비각을 세우게 했다.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으로 무너진 것을 경주시가 1992년 흙 담장을 말끔히 보수하고 높이 75cm, 넓이 30cm, 두께 10cm의 비신을 정돈했다. 광명동 2개 비각 관리 손길 미치지 못해 1993년 당시 본지 보도에 따르면 광명동 소재 2동의 비각은 경주시가 한 차례 정비한 것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찾은 현장에는 관리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진양하씨지각은 비신이 없는 탓일까? 비각 입구에는 쓰레기들이 쌓여있었고, 내부에는 수풀이 우거져 접근조차 어려웠다. 비신이 없어진 시점조차 파악되지 않으면서 비지정문화유산에 대한 관리대책을 서둘러 마련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현장 상황이었다. 그나마 관리의 손길이 닿은 것으로 보이는 김두망지비도 내부 비신을 보호하는 나무 살대 일부가 떨어져 나가 있는 등 보수가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주시 등 관리 당국이 이들 비각의 정비를 통해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효자·열부들의 훌륭한 효(孝) 사상이 이어질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① 안강읍 갑산리 ‘효부이씨 정려비’<孝婦李氏 旌閭碑> 안강읍 갑산리에는 임진왜란 당시 적장이 효부(孝婦)의 효행에 감복해 왜적의 침탈로부터 면하게 됐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효부이씨 정려비(孝婦李氏 旌閭碑)에 새겨져 있는 효부 이야기다. 이 비각은 경주에서 안강읍으로 가는 2차선 국도를 따라 갑산리 농공단지를 지난 뒤 옛 철길 건널목에서 300여m 쯤에 한옥 기와 한 채가 보인다. 바로 앞은 형산강 줄기다. 이 비각 내 비석에는 ‘孝婦李氏之閭(효부이씨지여)’ 여섯 글자가 음각돼있다. 이 비의 주인공인 이씨는 안강읍 죽전마을에서 태어나 영천군 창수마을의 문중으로 출가했다. 이씨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남편의 아버지 즉, 시아버지는 앞을 볼 수 없었다. 남편은 충절이 놀라운 선대의 피를 이어받은 선비로서 학문을 숭상하는 촉망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집안이 가난해 제대로 학문을 하지 못한데다 허약한 몸으로 인해 결혼한 지 1년도 못 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어머니마저 괴질로 몸져 누웠다. 청상과부인 이씨는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했지만 시어머니는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창수마을에서 살길이 막연하게 된 이씨는 여러 이웃들의 권유로 친정인 죽전마을로 돌아오게 됐다. 이후 이씨는 친정 집안 어른들로부터 어느 양반 가문의 후실로 재가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창수마을에 홀로 지내는 앞을 볼 수 없는 시아버지가 주야로 걱정돼 감히 재가할 마음을 낼 수 없었다. 생각다 못한 이씨는 시아버지를 설득해 죽전마을로 모시고 와 친정 집안이 마련해 준 오두막집에서 살게 됐다. 친정 집안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하면서 오로지 갈 곳 없는 시아버지를 정성으로 섬기며 살았다. 그러자 친정 집안에서는 시아버지를 영천으로 모셔다드리고 재가할 것을 재촉했지만, 이씨는 단호히 거절하고 시아버지 모시는 일에만 정성을 쏟았다. 항상 방을 따뜻하게 해 잠자리를 보살폈고, 식사 공양도 지성으로 받들었다. 인근 마을에서는 이씨의 효행에 칭송이 자자했다. 적장 ‘효부마을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 표식 남겨 하지만 때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적이 침략하면서 “왜적은 성질이 아주 포악해 부녀자들을 농락하고 잔인한 짓은 예사로 한다더라”, “왜적은 닥치는대로 사람을 죽인다”는 등의 말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집집마다 피난 준비로 부산했다. 이씨의 친정 집안도 피난가기에 바빴다. 이씨도 시아버지께 피난갈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맹인의 몸으로 다리마저 성하지 못해 며느리에게 짐이 될까봐 이씨에게만 피난을 떠나라고 말했다. “아가! 나는 이미 늙었으니 설령 왜적들이 온다 해도 어찌하겠느냐? 어서 사돈댁 식구들과 같이 너나 떠나거라”고 했다. 그러자 이 씨는 “아버님께서 떠나시지 않으시면 저도 아버님을 모시고 이대로 남겠어요”라고 했다. 효성이 지극한 이씨는 앞을 못 보고 다리마저 성하지 않아 걷지도 못하는 시아버지를 두고 차마 떠날 수는 없었다. 결국 친정 식구들의 강요를 뿌리치고 텅빈 마을에 시아버지와 외로이 남았다. 이씨는 집에서 왜적들에게 당하는 것보다 시아버지를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에 갑산마을로 향했다. 그러나 저 멀리 왜적들이 오는 것을 보고 엉겹결에 유교(柳橋) 다리 밑으로 내려가 시아버지와 함께 숨었으나 들키고 말았다. 이 씨는 짐보따리 옆에 시아버지를 숨기고 치마로 덮어두고는 떳떳이 왜적들을 맞이했다. 왜적들이 치마를 들치고 시아버지를 발견하자 더욱 수상히 여겨 죽이려했다. 이때 이씨는 왜적들에게 “아버님을 죽이려거든 나를 죽여라”하며 대항했다. 왜적들은 시아버지를 가짜 맹인이라고 우기며 칼로 내려치려 할 때 마침 다리 위에서 말을 타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왜적 장교가 “두 사람을 이리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러고는 10리나 떨어진 죽전마을까지 끌려갔다. 왜장은 외모가 귀골스럽게 생긴 시아버지를 첩자로 알고 혹독하게 문초했다. 그러자 이씨는 왜장에게 매달리며 손짓발짓으로 사실이 아님을 전하려 했으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왜적들은 시아버지를 막아서는 이씨를 사정없이 매질했지만, 이씨는 시아버지만 살려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끈덕진 부인의 호소에 감동된 왜장은 왜적 첩자와 통역을 통해 이씨와 시아버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했다. 갑산마을과 죽전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이씨의 덕행을 알게 된 왜적들은 그의 효행에 감복했다. 왜장은 이 씨에게 “훌륭하신 부인을 몰라뵙고 무례하게 행한 일을 용서하오”하면서 사과하고, 부하에게 명령해 지필묵을 가져오게 했다. 왜장은 ‘효부의 마을에 함부로 들어가 동민을 해치지 말라’는 글을 써서 마을 입구에 표식을 남기고 떠났다. 이후 왜인들은 갑산마을을 지나치면서도 동민들을 괴롭히거나 약탈 방화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갑산마을 사람들은 ‘이씨의 지극한 효성 때문에 온 마을이 왜적의 참화를 모면했다’며 이씨의 효성을 기리는 효부각을 세워 오늘에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효부이씨 정려각 앞에는 효부이씨의 일화를 새긴 비석이 있다. 1991년 10월 세운 비석에는 건립 연대(조선 인조 조), 위치(경주군 안강읍 갑산리 715), 관리주체(창녕조씨 하양중립 죽원재 문중) 등이 새겨져있다. 또 ‘인조께서 정려해 건립했으나 그 후 퇴락해 1805년 중수하고, 1923년 철도 부설로 인해 현 위치로 이건했으며, 1960년 보수 후 1991년 10월 중건하다’라고 건립 연혁도 기록돼있다. ② 안강읍 대동리 ‘월성손씨정려비’<月城孫氏旌閭碑> 안강읍 대동리 182번지에는 조선시대 암행어사가 조정에 알려 세웠다고 전해지는 월성손씨정려비(月城孫氏旌閭碑)가 있다. 본지 146호(1992년 12월 7일자) 보도 당시에는 정려비가 쓰려져 있어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지난 2일 찾은 이곳의 비는 제대로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비각 내외로 수풀이 우거져 있고, 안내판은 녹슬어 있는 등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었다. 출입문은 잠겨져 있어 내부를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정려비는 최근에 세워진 듯 보였다. 이 비의 주인공은 월성손씨다. 집안에서 엄격한 가풍 속에서 자란 손씨부인은 총명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부덕을 닦아 현모양처로서 손색이 없는 인품을 갖췄다고 한다. 조선조 때 김씨와 지금의 약혼식으로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손씨가 결혼해 시댁에 들어가기도 전에 남편이 모진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아눕자 시댁에 들어와 성심을 다해 남편을 간호했다. 그러나 남편 김씨는 부인이 간호한 효험도 없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말았다. 손씨 부인은 남편을 따르고자 결심했으나 시부모님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가족들 몰래 집을 빠져나와 마을 앞 연못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이 주민들에 의해 암행어사에게 알려졌고, 암행어사는 조정에 알렸다. 조정은 열부 경주손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정려하고, 비와 함께 비각을 세웠다. 이상욱 기자 lsw8621@hanmail.net
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임진왜란 때 열부·열녀 도리지킨 월성최씨(月城崔氏) 기려 건천읍 대곡리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열녀비가 세워진 비각 2곳을 만날 수 있다. 그 중 한 곳이 효자훈속봉사손공봉선열부단인월성최씨지비(孝子訓鋉奉事孫公奉先烈婦端人月城崔氏之碑)다. 본지 제151호(1993년 1월 11일자)에 실린 함종혁 선생의 칼럼에는 임진왜란 당시 월성 최씨 부인에 대한 공적이 기록돼있다. 이에 따르면 최씨는 본관은 월성이며, 밀양손씨 봉선(奉先)의 처다. 최 씨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편과 시어머니를 봉양함에 깊은 부도(婦道. 며느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있었다. (왜적이 침입했을 당시) 남편 봉선이 그 어머니와 함께 구미산 속에 피했다. 갑자기 왜적이 나타나 그 어머니를 찌르려 하는지라 봉선이 이르기를 “나를 죽이고 어머니를 살라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이를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왜적들은 단칼에 모자를 죽였다. 이때 최씨 부인은 왜적들의 앞을 가로막고 남편과 시어머니를 살려보려고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의 몸으로 남편을 가리고 손으로 왜적의 칼날을 막다가 손가락이 끊기고 몸이 상해 피를 흘리며 거의 죽게 되니, 왜적들은 이들을 버리고 가버렸다. 최씨 부인은 곧 깨어나 직접 남편과 시어머니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냈다. 최씨 부인은 그의 자녀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왜병들과 싸울 때 시어머님, 남편과 함께 죽지 아니한 것은 시어머님과 남편의 시신을 거두려 함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남편이 이미 어머니를 위하다 죽었는데 내 어찌 차마 혼자 살기를 원하겠는가”하고 목매어 자살했다. 이 같은 사실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 임금은 정려를 명하니 작원(건천 2리)에 최씨의 열녀비를 세웠다. 이후 오랜 기간 비바람에 씻기고 수해에 밀려 붕괴 직전에 있는 것을 197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자신의 살을 베어 남편 살린 순흥안씨(順興安氏) 이야기 월성최씨지비와 70여m 떨어진 곳에 지금까지 잘 보존돼 온 비각을 찾을 수 있다. 이곳이 열부순흥안씨정려비(烈婦順興安氏旌閭碑)다. 본지 제156호(1993년 2월 22일자) 함종혁 선생 기고에 따르면 안씨의 본관은 순흥으로 경주이씨 유헌(裕憲)에게 출가했다. 효성이 지극해 30여년간 시부모를 정성으로 봉양하다가 남편 이씨가 병이 들어 30여년 동안 병석에 눕게 되자 정성으로 간호했다. 하지만 효험이 없어 애태우던 중 한 의원이 이르기를 “사람고기가 좋다”는 말을 전해 듣고 서슴없이 자신의 허벅다리살을 베어 푹 달여 먹여 회생시켰다는 것이다. 그 후 안씨 부인은 살을 베어낸 상처로 인해 앓기를 수개월을 보내다 그만 죽고 말았다. 안씨 부인이 행한 사실을 주민들이 알고 가상히 여겨 관아에 알려 상을 받게 했다. 또 열부 안씨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고종 33년(1896년) 성창(成昌)에서 포상을 받고 1933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으나 오랜 세월로 퇴락이 심한 것을 문중에서 재건해 잘 정돈했다. 건천읍 금척리 소재 ‘절부안동권씨표려비(節婦安東權氏表閭碑)’ 건천읍 금척리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 위치한 주유소 옆에는 시멘트 철근 골조로 된 비각이 하나 세워져 있다. 본지 제155호(1993년 2월 15일자)에 따르면 이 비각은 안동권씨(安東權氏) 부인을 기리기 위해 1938년 세워졌다. 하지만 오랜 세월로 훼손이 심한 것을 1972년 현재의 위치에 옮겨 세웠다고 전한다. 동경통지(東京通誌)에 따르면 권씨 부인은 崔海南(일명 崔南逸)의 아내다. 오랫동안 큰 흉년이 들어 남편의 형제 세 집이 모두 기아의 지경에 이르게 되자 가족들을 모두 한 집안에 모으고 의식(衣食)을 함께 했다. 그러던 중 권씨 부부가 함께 병을 얻어 4~5일이 지난 뒤 권씨 부인이 낙태를 하여 혼미 중에 있었다. 남편이 또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남편에게 수혈시켜 회생하게 했다. 그러나 끝내 남편 최씨가 죽자, 4일 동안 단식을 하며 그를 따라 죽으려하다가 자식들의 호소로 마음을 돌렸다. 이후 기울어져 가는 가세를 다시 일으키고 자녀들을 잘 교육시켰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라에서는 권씨 부인을 절부로 정려하고 높이 160cm, 너비 45cm, 두께 27cm의 비석을 세워 권씨의 공적을 기렸다.
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편집자주 ‘경주 황남동 효자 손시양 정려비(慶州 皇南洞 孝子 孫時揚 旌閭碑)’는 현존하는 효자비 중 가장 오래된 비다. 이 정려비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제68호)로 지난 1963년 1월 21일 지정됐다. 지금은 황리단길로 널리 알려진 이곳은 황남시장에서 동쪽으로 2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문화재당국의 관리 아래 잘 보존돼 오고 있는 이 정려비는 경주지역 효 사상의 상징이기도 하다. 현재 이곳을 소개하는 안내판에는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고려 명종 12년(1182년)에 세운 것으로, 현존하는 효자비 중 가장 오래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강암 비석에는 사각기둥 모양의 몸돌만 있고 받침돌과 머릿돌은 없다. 앞면에는 ‘孝子里(효자리)’라고 크게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손시양의 효행과 비를 세운 경위가 기록돼 있다. 손시양은 고려 중기 사람으로 부모가 돌아가시자 초막을 짓고 각각 3년씩 묘소를 지킴으로써 자식의 도리를 다했다. 그의 효행을 동경유수 채정이 나라에 보고하니 나라에서는 마을에 정문(旌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그의 집 앞이나 마을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을 세우고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원래 길가에 비석만 세워져 있었는데, 1977년에 지금 모습과 같이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각을 만들어 세웠다’고 기록돼있다. 함종혁 선생은 1993년 당시 본지 기고에서 손시양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손시양은 고려 명종 때 사람으로 행실이 바르고 부모에 대한 효심이 얼마나 많은지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부모가 살아계실 때와 같이 무덤 옆에서 함께 생활했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부모 무덤에 아침인사를, 또 아침·점심·저녁 식사를 지어 올리고, 밤이 되면 ‘안녕히 주무십시요’하고 하직 인사를 하는 등 부모가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효행을 다했다. 아버지 3년, 어머니 3년, 도합 6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비바람이 불어오나 하루같이 시묘(侍墓, 부모의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사는 일)생활을 하면서 무덤의 봉분을 보살펴왔다. 명종 12년 동경유수가 이 같은 사실을 왕에게 상소해 려(閭, 마을의 문)에 정표(旌表, 어진 행실을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알림)함이 마땅하다고 간청했다. 왕은 쾌히 승락해 효자리비가 세워지게 됐다. 이 석비는 자연석을 방주형(方柱形. 네모진 기둥)으로 깨어 석면을 곱게 다듬지 않은 채 울퉁불퉁 자연 그대로 높이 194cm, 너비 61cm, 두께 33.5cm 크기로 세웠다. 비신 앞면에는 글자 간격 30cm의 ‘孝子里(효자리)’라는 세글자를 음각했고, 뒷면에는 5행의 해서 비문이 글자간격 5cm의 대자로 128자가 음각됐다. 뒷면 글은 손시양의 효행 내용과 정려비의 건립경위가 음각돼 있으나 마멸이 심해 13자가 판독되지 않고 있다. 비문에는 손시양의 효행을 널리 알려 백성들이 지켜야 할 효도정신을 고취시키려던 유서 깊은 비석으로, 노천에 방치돼 있던 것을 1977년 경주시가 기단을 설치하고, 목조기와로 된 보호각을 건립했다. 또 금석총람(金石總攬)에는 이를 신라효자(新羅孝子)라 했으나. 비문의(碑文意)로 보아서는 고려시대 비임이 틀림이 없는 듯하다고 경주시지(慶州市誌)에 기록돼 있다. 손시양 정려비는 고려시대 일반적인 비의 형식과는 달리 사각기둥 모양으로, 불교와 관련되지 않은 비문으로서 희귀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다음은 손시양 정려비 뒷면에 새겨진 비문과 그 해석이다. ▨은 글자가 마멸돼 판독되지 않는 부분이다. 里中有擧子孫其姓時揚其名▨▨▨▨▨其父允伯端坐而終葬于 州南冷泉寺之北山廬于墓隱守之三年服▨而去及其母死歸葬金 山中谷守墳又如是以▨人之事親之道▨州▨具是狀以聞其留主 留守以聞 上上嘉其孝行旌表門閭使▨▨▨欲爲後勸云 時大定二十二年壬寅十二月▨日 東京留守 蔡靖誌 마을에 한 거자(擧子)가 있으니, 손(孫)이 성이고 시양(時揚)이 이름이다. … 이고 그 아버지 윤백(允伯)이 단정히 앉아서 임종하니, 주(州)의 남쪽 냉천사(冷泉寺) 북산(北山)에 묻었다. 묘에 오두막을 짓고 묘를 지키기를 3년(三年)을 마치고야 그만두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심에 금산(金山)의 중곡(中谷)에 묻었는데, 묘를 지키기를 또 이전과 같이 하였다. 이로써 사람이 부모를 섬기는 도리[事親之道]를 다하였다고 하여 주(州)에서 이러한 상황을 갖추어 유수(留守)에게 아뢰니, 유수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이 그 효행을 가상히 여기시어 그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였다. 때는 대정(大定) 22년(명존 12, 1182) 임인년(壬寅年) 12월▨일이다. 동경유수(東京留守) 채정(蔡靖)이 짓다. 충효동 지명이 유래된 ‘관란 이승정 정효각’ 첨성대와 인접한 곳에 한옥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문호사(汶湖社)다. 건물 바깥에 있는 비는 관란(觀瀾) 이승증(李承曾) 창의비(倡義碑)다. 문호사 내부에는 이승증을 기리는 사당과 정효각(旌孝閣) 등이 있다. 문호사는 조선 중기 성리학자 관란 이승정의 서원 유적지로, 공의 충효 정신을 받들기 위해 제향하는 곳이다. 먼저 그의 정려각에 새겨진 효심에 대한 이야기다. ‘당시 본지 보도(제149호, 1992년 12월 28일자)에 따르면 이승정은 8세 때 모친상을 당해 3년간 현재의 충효동에 어머님의 무덤을 마련하고, 바로 옆에 움막을 지었다. 그리고 어머님이 살아계실 때와 같이 3년간 아침·점식·저녁 식사를 올리고 하루도 호곡(號哭, 목 놓아 슬피 움)을 그치지 않았다. 그의 효행이 얼마나 지극했던지는 당시 도적들도 이곳을 피해 다녔다. 팔용(八龍)의 도적 떼는 각 읍면에 출몰해 백성을 죽이고 아녀자를 겁탈하며 양곡을 약탈하고 다녔다. 하지만 이승증이 시묘살이하는 묘역을 지나면서는 ‘여기는 효자가 있는 곳이니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지말라’고 하며 무리를 거두어 피해 다녔다. 이 같은 효행이 하늘에 닿았는지 호랑이가 여막 앞에 짐승을 잡아다 물어 놓고 갔다고 한다.특히 지금의 충효동은 효자 이승증이 시묘하던 곳이라 해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다음은 창의비 이야기다.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우리나라를 침범해 오는 왜적을 방어하는 사람을 찾고 있을 때, 이승증은 78세 노구를 이끌고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진두지휘하고 왜적과 싸웠다. 그는 1558년(명종 13)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해 나라에서 여러차례 관직에 제수했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고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고 한다. 또 그는 혼자 힘으로 보문들에 보를 막아 물길을 열고 천여정보의 옥답을 만들었다. 창의비는 1972년 이승증의 임진왜란 때 국가의 위기를 극복한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창의로 추서하고, 당시 경주시장 등으로 구성된 창의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건립했다. 선조는 후세 사람들이 그의 업적과 효행을 알 수 있도록 삼강록, 여지승람, 동경지, 유문집에 기록하도록 했다. 또 영조 26년(1750년) 효자로 정여(旌余)하고, 4칸 한식기와집의 비각을 건립했다.
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서악서원 안쪽마을 충효서악길을 따라 선도산 동쪽 기슭(서악동 447)에 붉은 담장과 한옥 목조로 오랜 세월을 지키고 있는 정려각(旌閭閣) 하나가 돋보인다. ‘열부훈도 김련 처 김씨지여각(烈婦訓導 金鍊 妻 金氏之閭閣)’이다. 이번 호에서는 본지 1993년 4월 19일자(제164호)에서 함종혁 선생의 기고와 독자 김인식 씨가 제보한 비석 내용의 주인공 김련과 그의 부인에 대한 내용을 소개한다. 남편이 어려움을 만남에 자신은 공전(公戰)보다 용맹했고, 종은 아이를 보전하여 충성(忠誠)을 오로지 했네. (종은 아이를 충심으로 보전했네) 하늘이 열부(烈婦)를 이 땅에 살면서 대비하게 한 것이, (하늘이 열부를 내고 땅이 도왔는데) 어찌 능히 요란(擾亂)한 병기를 벗어날 수 없게 했는가? (어찌해서 전란의 칼끝을 벗어 날 수 없었던고?) 한 여자가 사물의 근본인 대강(大綱)을 부지(扶持)했으니, (아녀자로서 윤리의 큰 벼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이는 백세(百世)(약 3000년)의 공(功)을 세우게 함이네. (이로 인하여 백세의 공을 세우노라) 왜적에 굴하지 않고 아들 지켜 낸 ‘부인 김씨’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칼날 앞에서 아들을 지켜낸 김련의 부인 이야기가 정려각 비석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먼저 함종혁 선생의 이 비문에 대한 해석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침범했을 때 남편인 김련은 곽재우와 화왕산성에서 싸우느라 집을 나간 후 행적을 감추게 됐다. 남편 소식을 몰라 애태우던 열부 김 씨는 세살난 갓난아이를 안고 남편을 찾아 산길을 통해 찾아가던 중 어느 산중에서 왜적에게 잡혀 그 앞에서 매를 쳤다. 그러나 김 씨는 아이를 안고 죽음에 이르면서까지 왜적에 따르지 아니하니 왜적이 아이를 빼앗아 다른 숲에 숨겨 놓아두고 부인 김 씨를 죽였다. 왜적의 칼날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키니 후세인들이 우러러보게 됐으며, 이를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비를 세우라 명했다’고 한다. 다음은 김인식 씨가 알려 준 이 비의 정려비문(旌閭碑文)에 담겨 있는 부인 김씨 이야기다. ‘임진(壬辰, 1592)년 난리에 왜적의 날카로운 기세가 극도로 날래어 고을과 부락이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나 자취를 감췄다. 당시 김련(金鍊)은 병거(兵車, 전쟁 시 공무수행 수레)로 가서 서울에 있었다. 부인 김씨만 홀로 3세 아이를 데리고 서쪽 골짜기에 숨었는데 적을 만나 잡히자 아이를 안고 소리 내어 슬피 울었다. 적은 아이를 빼앗아 다른 곳으로 두려 하자 앞을 가리고 매를 맞으며 김 씨는 한 발짝도 옮기지 않았다. 마침내 해를 입어 죽게 됐다. 이 같은 사실이 조정에 들리자 이곳 마을에 정려를 세워 부인의 의연함을 모두 알 수 있게 했다’고 전한다. 이 정려비문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경주는 적의 길목이었고, 왜군에 의해 희생된 백성들이 많았다. 조정에서는 이들 모두 포상을 내리기 위해 남산을 모두 뒤져 도설(棹楔, 정려)을 세워 숭상했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순국한 부인 김씨는 명단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당시 부인 김씨가 운명할 때의 일을 집안에서 대략 적었으나 자세하지 않았고, 정려각(旌閭閣)을 세운 년·월 또한 고찰할 수 없었다는 것. 이를 바로 잡은 것이 김련과 부인 김씨의 후손들이라는 내용이 정려비문에 담겨 있다. 비석의 비명(碑銘)에는 부인의 공적을 높이 기리고 있다. 이 비명은 조선 숙종 때의 영양 남용만이 짓고, 서산 류하현이 썼다. 임란 때 전공 세운 ‘김련’의 공적도 전해 내려와 김씨 부인이 왜군에 의해 희생될 당시 남편 김련에 대한 업적도 정려비문과 그의 묘비 등에 기록돼있다. 김련의 묘와 묘비 ‘중직대부 예빈시부정 월성 김공지묘(中直大夫 禮賓寺副正 月城 金公之墓)’는 김씨 부인의 정려비와 인접한 서악동에 위치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김련의 휘는 연(鍊)이고 자는 정중(精仲)이며, 호는 사천(沙川)이다. 성은 김, 본관은 월성이며 신라 경순왕 다섯째 아들 대안군 휘 은열(殷說)의 후손이다. 김련은 태어나면서 재주가 특이했고, 성장하자 힘과 용맹이 뛰어났다. 일찍이 유업(儒業)을 익혀 과거에 응시했다. 임진왜란 때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의병장 곽재우와 화왕산성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성을 지켰다. 그의 전공으로 이듬해 유학훈도로 관직에 올랐고, 얼마 되지 않아 종사품인 예빈첨정을 거쳐 종삼품의 ‘중직대부 예빈시부정’까지 관위(官位)가 올라갔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인 ‘용사(龍蛇) 창의록(倡義錄)’에도 김련의 행적이 나온다. “공(公, 김련)은 낙동강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의병장 곽재우가 (군사를)모집하는데 응해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힘을 다하여 사수(死守)하다 전쟁이 끝나자 집으로 돌아왔다”라고 기록돼있다. 김련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공은 여러 명현의 창의록에 기재돼있지만 조정에서 돌아가신 분에게 내린 녹권의 특전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공적 기록에 빠뜨리거나 고증할 수 있는 글이 전란을 겪으면서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후손들은 추정하고 있다. 다만, 1962년 여강 이석교가 지은 비명(碑銘)에 의해 김련의 공적을 기리며 후손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고 있다. 왕손의 후예로서 문무과 모두 뛰어났다. 임진년 왜란을 당하여 사리(事理)의 취사를 잘 구별하였다. 홍의장군을 도와 책략을 세우며 칼날을 무릅쓰고 전란에 뛰어들었다. 나라 은전으로 예빈시에 올랐고 열부는 진정 의사의 배필이었네. 녹훈이 우연히도 충훈부에 누락됐으나 이름은 찬연히 야사에 실려 전한다. 강상을 바로 세우는 건 충이고 위난을 막은 것은 공이라 말한다. 장산 기슭 해좌 둔덕에 이 비석 무궁히 전하리다.
양세정려각·최치백 정려비 등 2곳 관리 안돼 비문에 새겨진 거룩한 효(孝) 사상 상실 우려 다시 돌아보는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