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 되자 문파 선생도 단안을 내렸다. 선생은 아픈 몸을 이끌고 사랑채로 나왔다.
아리가는 선생이 몰라볼 정도로 수척한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아니, 최선생, 편찮으시다는 말씀만 듣고 속을 태우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이렇게 몸을 상하시다니요…”
아리가는 진심으로 선생을 염려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선생은 그런 아리가가 더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어쨌거나 답은 해주어야 했다. 선생은 숨을 크게 내뱉고 말을 꺼냈다.
“두취 각하, 죄송합니다만 저는 중추원 참의를 못합니더”
결론부터 꺼내 놓자 아리가가 당혹스런 표정을 얼굴 가득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을 보며 선생이 말을 이었다.
“성격이 모나 총독 각하께 누 되고, 추천한 두취 각하 체면도 망치니 참의 못 해”
“제가 참의를 못 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심더. 제가 성질이 모나고 거칠어서 속엣말을 감추어 놓고는 못 사는 기라요. 수백 년 부잣집 종손인 제가 안하무인으로 살았심더. 그라이 총독 각하를 만나는 자리에서 지멋대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낀데, 그라믄 총독 각하인테 누가 되기도 할 뿐 아이라 저를 추천해 주신 두취 각하의 체면도 망치게 될 끼라요. 그라이 저는 참의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아리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은 채 한참 동안 눈을 감고 묵상하듯 앉아만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쩔 수 없지요. 조선 속담에 ‘평양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안 한다’는 게 있었지요…”
아리가는 오히려 문파 선생을 위로해 주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렇다고 말씀만 하시면 되지 이렇게 몸이 상하도록 앓고 계셨습니까? 제가 이렇게 최선생을 괴롭혀야 되겠습니까?”
아리가는 이번에도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과 달리 얼굴에는 침중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끝내 불평 한마디 건네지 않고 경성으로 돌아갔다.
아리가가 돌아간 날, 집안에서는 대소가 어른들과 가장들이 모여들었다. 이미 사흘 동안이나 선생이 몸져누웠고 그 이유가 중추원 참의 자리 제안에서 비롯된 것이란 소문은 집안 가득 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문파 선생의 결정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집안 어른들은 끝내 선생이 그 제안을 거절했다는 것을 알고는 이제 모두 집에서 쫓겨나기라도 하는 듯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보래, 언놈들은 중추원 참의를 안 시캐 조가 안달이라 카던데 자네는 가문이 몰락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게 머 대단하다꼬 그 자리를 마다 캤노?”
이때쯤 선생에 대한 불만도 만만치 않았던 시점이었다. 선생의 사업 실패로 인해 가문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는데 이제 내놓고 일본의 눈 밖에 나게 생긴 것이다. 둘러선 종반들도 안타까운 눈빛으로 선생을 닦달했다. 선생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
“중추원 참의를 받으믄 내놓고 친일을 하자는 말입니더. 정무공 할배가 이거를 아시믄 무덤에서 뛰어 나오실 낍니더”
한동안 사랑채 안은 깜깜한 침묵이 흘렀다. 집안사람들 역시 중추원 참의 자리를 받은 것은 지금까지 지켜온 집안의 정신을 송두리째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긴 것이다. 더구나 선생이 왜적을 물리치던 정무공 할아버지까지 들먹이자 선뜻 참의 자리를 받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긴 침묵을 깬 것은 동생 최윤(1886-1970) 선생이었다.
“그라믄… 이래 하시믄 어떻겠십니꺼?”
방안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최윤 선생 쪽으로 쏠렸다.
“형님은 이 집안의 가장이고 종손이시더. 그러니 집안의 체통도 지켜야 되고 또 조상님들의 가르침도 받들어야 댑니더”
최윤 선생은 잠시 말을 끊었다.
“형님 대신 저에게 참의 자리를 달라꼬 해보지요. 제 욕심으로 참의를 달라 했다믄 형님도 욕을 안 묵고 집안도 지킬 수 있지 않겠능기요! 욕은 제가 먹지요”
둘러앉은 사람들은 최윤 선생이 스스로 오욕을 짊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토로하면서도 그게 제일 좋은 안이라며 입을 모았다. 문파 선생 역시 그게 최선의 방법임을 알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중의가 모아진 셈이었다. 그러나 문파 선생은 그조차도 못내 석연찮았던 모양이었다.
“나 보고 한 참의 자리를 니인테 줄라 카겠나?”
그러자 최윤 선생이 되받았다.
“형님, 그럼 저에게 중추원 참의를 시켜달라꼬 편지를 써주시소”
선생은 다시 한번 발을 뺐다.
“아리가가 올 때마다 니가 델꼬 다니며 구경도 시키고 술도 마시고 했는데 편지가 뭐 필요하겠노?”
일단 이렇게 최윤 선생이 참의를 맡고 직접 아리가를 찾아가는 것으로 중론이 모아졌다.
“윤아, 이제 니가 친일파라 카는 욕을 먹게 댔다. 이 일을 우야믄 좋노”
모두가 돌아간 넓은 사랑채에서 문파 선생과 최윤 선생 둘만 남았다. 선생은 장죽을 빨며 긴 한숨을 쉬었다. 최윤 선생이 오히려 형을 위로했다.
“형님, 너무 상심 마시소. 그래도 집안은 지켜야 되는 거 아입니꺼? 다행히 완이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으이 그래도 가문의 명예는 지키는 거 아입니꺼? 우리 집이 이래 어렵게 된 거도 남들은 머라칼지 몰라도 전부가 나라 찾을라 카다가 이렇게 된 거까네, 냉자 시간이 지나믄 자연 알게 될 낍니더.”
그런 동생을 선생은 측은하게 다독였다.
“앞으로 니인테 많은 어려움이 따릴 끼다. 니를 쏴죽이겠다꼬 달려드는 독립지사들도 있을 끼고… 몸조심 단디 해라!!” 최윤 선생은 허허 웃어넘겼다.
“형님, 제가 무술도 한 사람인데… 제 앞가림은 안 하겠는교. 너무 근심 마시소”
이렇게 최윤 선생이 경성을 향해 떠났다.
맨 테이블에서 말석으로, 기부금 내지 않고 학도병 독려 연설도 하지 않아!
“뭐라, 최부잣집에서 사람이 왔다고?” 아리가 두취는 집무실에서 경주 최부잣집에서 사람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문파 선생이 온 줄 알고 숫제 슬리퍼를 신은 채 뛰어 나왔다고 한다. 총독의 명령으로 문파 선생을 회유하러 간 것인데 보기 좋게 거절 당했으니 이후 보고할 것이 막막했을 것이다. 그런 차에 최부자댁에서 사람이 왔다고 했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그러나 응당 문파 선생이 왔을 것이라 알고 달려 나왔는데 뜻밖에 최윤 선생이 왔던 것이다. 이런저런 인사가 끝나고 최윤 선생이 서울로 온 이유를 꺼내 놓았다.
“말씀 들으셨다시피 형님은 참의하실 성질이 못 됩니다. 그러나 저는 세상 물정에도 밝고 시류도 잘 압니다. 제가 자격은 없지만 형님을 대신해 저에게 참의 자리를 주십시오”
혹여라도 난색을 표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던 최윤 선생의 염려와 달리 아리가는 대환영의 뜻을 보였다고 한다. 아리가는 즉석에서 총독에게 그렇게 보고 하겠다며 만면에 웃음을 지어보였고 융숭하게 최윤 선생을 대접해 돌려보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총독부는 즉시 최윤 선생에게 중추원 참의를 제수한다는 통보를 해왔다.
그러나 이렇게 힘든 결정을 한 것과 달리 최윤 선생은 중추원에서 특별하게 한 일이 거의 없었다. 원래 중추원 참의라는 직책이 이름뿐인 단체로 전술한 대로 총독의 정책에 박수나 쳐주는 일제 관변단체에 불과했다. 게다가 최윤 선생은 뇌화부동할 일이 있으면 번번이 길이 먼 것을 핑계로 참여하지 않기 일쑤였고, 앞장설 일이 있어도 체질적인 반감으로 인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최윤 선생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려던 시기, 전쟁에 협력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친일행각에 동참했다. 경주 역사를 직접 지휘해 지었고 경주경찰서와 경주 금융조합 건물 등을 지휘해서 신축하기도 했다. 건축은 평가에 따라 친일 행위일 수도 있고 단순한 행정사업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최윤 선생은 그 건축 사업에 기부하지도 않았고 나중에 학도병을 동원하는 연설도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참의가 된 후 첫 참가한 행사에서 최윤 선생의 자리는 총독의 맨 테이블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밀려나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총독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말석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맨 테이블이란 총독과 마주 보는 바로 앞자리로 스스로 원해서 중추원 참의가 된 친일 인사들에게는 서로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해 안달할 만큼 귀한 자리였다.
어쨌거나 최윤 선생은 어디를 가나 친일파라는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고 심지어는 가까운 집안사람들조차 나중에는 선생을 멀리했다고 한다. 비단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해방되고 난 이후, 최윤 선생의 참의 활동은 끝내 문파 선생마저 친일파로 옥죄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