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 되고 한참 뒤, 반민특위라 카는 게 맹글어져서 친일파들을 무조건 잡아가기 시작했어요. 그때 작은 할아버지께서 제일 먼저 대구 반민특위로 잡해 가셨어요!” 반민특위와 관련해 최염 선생이 가장 기억되는 일로 작은 할아버지 최윤 선생이 반민특위에 체포된 사실을 꺼내셨다. 반민특위는 1948년 10월 22일, 해방 후 3년이 지나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만들어졌다. 반민특위가 공식 출범했다는 말이 나오자 마자 최윤 선생이 갑자기 들이닥친 일단의 사람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것이 반민특위라는 곳이었다. 반민특위는 한 달 전인 1948년 9월 22일 제헌국회의 발의로 설립된 정식단체였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때까지 국내에서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하던 좌익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친일파 색출을 위한 단체였다. 반민특위는 단체를 만들자마자 본보기로 가장 먼저 중추원 참의였던 최윤 선생을 끌고 갔던 것이다. 그러자 문파 선생은 동생을 위해 서울로 가서 정인보 선생 등 독립지사들을 찾아 다니며 당시의 정황을 설명하며 구명운동을 펼쳤다.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니 친일한 정황은 사실이나 참의를 하는 동안 두드러진 친일 행위를 한 것이 거의 없고 그게 다 자신의 처지를 대신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니 그 정상을 참작해 달라’며 청원한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문파 선생까지 이름 올라. 독립운동 증명으로 가장 먼저 삭제 이런 문파선생의 설득과 구명운동 끝에 최윤 선생은 며칠 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윤 선생은 독립운동가 집안에 친일파가 났다는 악의적 손가락질로 인해 더 심각하고 더 악랄한 것으로 낙인찍혔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 뒤 한참이나 더 지난 1990년대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만들 때는 최윤 선생은 물론 문파 선생조차 일차로 친일파의 명단에 올라 또 한 번 역사의 굴욕을 겪어야 했다. 다행히 문파 선생은 여러 정황과 독립운동의 사실이 증명되어 친일인명사전에서 가장 빨리 풀려났다. 그러나 최부자댁에 내려진 친일파의 족쇄는 쉬 풀리지 않았다. 최윤 선생은 스스로 결심한 바가 있어서 결정한 일이지만 친일파라는 주홍글씨는 선생 당대만 낙인찍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할아버지의 아들과 손자에 이르기까지 대물림되어야 했다. 그것은 여타의 친일파들이 겪는 것과는 사뭇 다른 면이 있었다.   전통의 명문가라는 사실이 대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면 모를까 10대 이상 누려온 명가가 쓴 친일의 멍에는 그만큼 더 짙고 컸던 셈이다. 그에 대한 최염 선생의 회고.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공과 친일을 했다는 불명예를 맞바꿀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바꾸고 싶으셨을 겁니다. 늘 ‘내가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었든 거는 너거 작은 할배가 집안을 지캐 냈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시곤 했지요” 실제로 문파 선생은 최윤 선생이 친일파로 행세한 덕분에 느슨해진 일본 경찰의 감시망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적지 않게 독립운동자금을 댈 수 있었다.   전 재산이 일본의 신탁관리를 받았지만 식산은행이 내주는 생활비는 부잣집으로 행세하고 다녀도 좋을 만큼 넉넉했다. 그 돈을 조금씩이라도 모아 꾸준히 독립운동 자금으로 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산무역이 파산하고 문을 닫은 이후 문파 선생의 독립자금 전달은 이전보다 훨씬 어려워질 수밖에 없어서 선생은 주로 경주 서남산에 있는, 윗대 조상님들이 세워 놓은 ‘와룡암’이라는 정자를 절로 만들어서 독립자금을 전달했다. 부처님 조상 밑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 거기에 기밀 서류를 넣어두거나 스님을 가장한 독립운동가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무인 포스트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일본 역시 불교에는 우호적인 편이라 거기까지 사찰 대상에 넣지 않았던 맹점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사안의 중대성으로 인해 세간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뒤에 상해에서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들어온 후에야 문파 선생의 독립자금지원 사실이 명백히 밝혀졌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최윤 선생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요지부동, 바뀌지 않았다. “해방이 되고 나서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 대접을 받았는데 작은 할아버지는 끝내 친일파가 되어버렸지요. 그 때문에 그 후손들이 말도 못할 천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문파 선생은 역할을 분담했을 뿐, 아우 최윤 선생 역시 독립운동의 한쪽을 맡은 것이라며 힘써 말씀하셨고 한다. 최염 선생이 전한 문파 선생의 육성을 옮겨 보자. “진짜 친일파들은 독립운동에는 관심도 없이 집안 전체가 일제에 빌붙어 뇌화부동한 사람들이라. 우리는 독립운동 하기 위해 한쪽으로 친일이라는 옷을 입은 기라! 진짜 친일파들은 판검사를 지내며 독립운동가들이나 같은 민족을 잡아들이거나 불리한 판결을 한 사람들, 경찰신분으로 독립 인사들을 괴롭힌 악질 경찰들, 쪼맨한 공직의 힘만 믿고 함부로 백성을 괴롭힌 친일 부패 관료들, 친일행위로 잡은 권력으로 또 다른 권력을 만들고 부를 축적한 놈들이라!” 그런데 정작 그런 진짜배기 친일파들은 해방 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오히려 독립투사로 면모가 뒤바뀐 채 그들이 거꾸로 진정으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을 옥죄고 잡아들이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문파 선생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피를 토하듯 괴로워했다고 전한다. 독립운동하기 위해 친일 허울 쓴 분들 국내에 의외로 많아. 그런 독립운동가들 구분해야 그런 한편으로 문파 선생은 친일에 대한 냉정한 평가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처음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을 한 사람은 친일파라 캐야 댄다. 글치만 처음에 머를 잘 몰라서 친일을 했다가 뒤에 독립운동으로 돌아선 사람들은 친일파가 아인기라. 거거는 독립운동가지러” 문파 선생의 독립운동가 구별법을 전하는 최염 선생의 표정이 결연했다. “독립 운동도 마찬가지라. 만주서 중국서 다른 외국서 내놓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당여히 독립운동가들이지러. 글치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가 억지로 친일을 한 사람도 알고 보믄 독립운동가인기라. 국내에서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겉으로는 친일파 허울을 써야 했등기라. 거거를 앞뒤 다 짤라버리고 친일한 거만 가지고 친일파라 카믄 그 사람들 속이 어떻게 댈끼고?” 그렇게 말하는 문파 선생은 언제나 긴 담뱃대 곰방대를 유기로 만들어진 재떨이에 떨듯이 탕탕 털었다고 한다. 동생을 변호하기 위한 문파 선생의 애절함이 부르르 떨리는 재떨이의 소리에 그대로 담겨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문파 선생의 일반적인 친일관은 또 다른 잣대가 엄연했다. “말이 쉬워 친일파지, 10이나 20년쯤이라 카믄 또 몰라. 글치만 35년이 넘으믄 완전히 한 세대가 넘어 가뿐기라. 을사년 늑약부터 치면 40년 세월이라. 이거는 쉽게 이길 수 없는 참말로 긴 세월인기라. 이쯤 되믄 친일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생활이 친일인 기라. 우리나라라는 개념도 거의 없고... 마 다 일본 사람이 대뿟는 기라. 그라이 친일이고 머고를 따질 일도 없시 그냥 일상인 거지. 일본이니 머니 따지고 있으믄 밥도 못 묵고 사는 판이니 거거를 부정하믄 굶어 죽는 거를 우얄 끼고. 그카이 그 시대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케다 친일파 아닌 친일파라 캐야 하능기라” 다만 문파 선생은 그 와중에 같은 민족을 괴롭힌 악질적인 친일파들만 단죄하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 정말 악질적인 친일파들은 자신들이 축적해 놓은 막대한 자본과 거미줄 같은 인맥을 활용하여 해방 후에도 고스란히 자신들의 영화와 권력을 누리는 또 다른 세력가들로 거듭 나 버렸다. “윤이는 내 땜에 친일파가 댄 기라. 그라이 너거 작은 할배가 친일파믄 나는 더 나뿐 친일파라 캐야 하고 내가 독립운동을 했다 카믄 너거 작은 할배 역시 아무도 모리게, 심지어는 평생동안 욕까지 먹을 각오를 하고 남몰래 독립운동을 한 사람인 거라. 세상이 거거를 모리고 너거 작은 할배를 친일파라꼬 몰아가 저래 자손들까지 욕일 믹이고 만 기라” 긴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할아버지는 기운 없이 한 마디를 더 남기셨다고 한다. “더 말해 머하겐노…. 이거도 다 나라 일까뿐 설움 아이겐나…. 그나마 반쪽 나라라도 찾아났으이 그래도 쪼매라도 덜 억울했든 기라…!” 이 장을 쓰면서 일어나는 매우 불쾌한 기억이 있다. 2023년 윤석열 정권에 의해 육군사관학교에서 독립유공자인 홍범도 장군 등의 흉상을 하겠다고 나서면서 생긴 분노다. 윤석열 정권의 독립운동 말살은 그뿐 아니었다. 독립기념관 관장에 독립운동을 훼손한 뉴라이트 인사를 앉히는가 하면 반민특위를 대놓고 짓밟은 이승만 기념관을 증설하는 독단을 일삼았다.   만약 독립운동가들이 보았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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