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병대 하면 지금은 군의 기강을 잡을 뿐 민간과는 별 상관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헌병대는 지금의 헌병대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일제는 군국주의 국가였다. 당연히 군이 최고의 권력을 가진 곳이었다. 헌병대는 그 중에서도 군을 감찰하고 통제하는 곳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치안유지의 명분으로 경찰이 존재했다. 그러나 경찰 역시 헌병대에 비해서는 아무런 힘도 없을 정도였다. 헌병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경찰보다 더 무섭고 살벌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문파 선생을 보자 했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양경찰서에서 부른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런데 문파 선생이 막상 헌병대에 도착하니 헌병대장이 깍듯이 인사를 하고 대접도 아주 융숭하게 해주더라는 것이 아닌가? 선생은 영문을 몰랐지만 기왕 해주는 대접이니 아무 토 달지 않고 실컷 대접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대접이 끝나자 헌병 대장이 공손하게 물었다.
“최 선생님, 평양에 땅을 좀 가지고 계시지요?”
선생은 헌병대장의 뜬금없는 물음이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답해 주었다. 그러자 헌병대장이 반색을 했다.
“바로 그래서 말인데요. 조선총독부에서 이번에 평양에 비행장을 건설하는데 선생께서 가진 그 땅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선생은 그 순간 등골이 서늘했던 모양이다.
“선생께서 그 땅을 헌납해 주실 수 없을까 해서요. 그렇게만 해주시면 최 선생이 원하는 건 무엇이건 편의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군국주의 시대, 더구나 식민지하에서는 경찰보다 군인이 무섭고 더구나 헌병대라고 하면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막강한 곳이다. 비록 경주와는 멀리 떨어진 공주라고는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닌 헌병대장이 직접 나서서 땅을 내달라고 하니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제안은 내놓고 친일행위를 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온갖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말은 친일파들이 누리던 혜택과 영화를 말하는 것이리라. 만약 여기서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자손만대 친일파라는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고, 반대로 제안을 거부하면 오래도록 헌병대에 시달리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그 순간이 매우 중요하다 생각하고 잠시 동안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마침내 단호한 결단을 내렸다.
“허허…, 아무리 그 땅이 값어치가 없어도 글치, 그라고 아무리 중요한 공사라고 해도 글치, 남의 땅을 무턱대고 내달라 카는 기 말이 되는가요?”
뜻밖에 할아버지가 완강하게 나오자 헌병대장의 눈꼬리가 씰룩하고 올라갔다. 그걸 무시하고 할아버지가 다음 말을 쏟아냈다.
“글치만 나라에서 하는 일을 모린 척 할 수도 없고 하이…. 이라믄 어떻겠능교?”
할아버지의 말에 헌병대장이 얼굴을 바짝 내밀었다.
“머, 내가 땅을 산 값이 있으이까네 그 땅이 필요하다 카믄 그 땅을 샀을 때 값에 돌려 드릴라 캅니다만….”
할아버지의 제안에 헌병대장은 다시 희색을 찾았다. 비행장을 짓는다고 했다면 인근의 땅값이 갑자기 올랐을 것이고 그렇다면 공항을 짓기 위해 막대한 경비가 들어가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 땅을 산 가격에 도로 내주겠다고 했으니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결국 할아버지는 산 가격에 그 땅을 내놓았는데 그때 건설한 공항이 바로 지금의 순안공항으로 북한이 제일 자랑하는 평양공항의 모습이다.
할아버지가 산 가격에 땅을 돌려주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발상이었다. 서슬 푸른 일제가 땅을 노리고 집요하게 달려들었다면 자칫 할아버지가 무슨 화를 당했을지 알 수 없다. 더구나 일제는 이미 군국주의의 화신이 되어 있었고 조선을 강제병탄하고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정권을 세운 후에는 공공연히 대동아공영권 운운하며 군비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 무렵만 해도 우리나라의 어지간한 친일 부호들은 일본에 비행기를 가져다 바치면서 충성맹세를 이어갔을 정도다. 그런 시기에 헐값으로 산 땅을 그냥 내놓지 않고 되팔았다는 것은 할아버지의 생각이 그만큼 강고했다는 증거다.
나중의 일이지만 남북한이 문화적, 종교적인 교류를 하던 때 성균관의 최근덕 관장이 북한을 몇 차례 다녀온 적이 있었다. 최 관장은 경주최씨 중앙종친회 회장을 했던 분이라 나와 친분이 두터운 분이었다. 당시 최 관장이 북한을 오가며 실세였던 장성택의 친척이 그쪽 종교 관련 단체의 대표여서 친분을 쌓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혹시 몰라 그 친척분을 통해 순항공항의 지적 등본을 떼 볼 수 있는 지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그 뒤 최 관장이 다시 북한을 갈 기회가 생겨 실제로 이 부탁을 그 북한 인사에게 전했지만 시일이 촉박하여 다음에 오면 반드시 지적등본을 떼주겠다는 약속만 받고 와야 했다. 안타깝게도 그 후 남북한 외교가 지속적이지 못해 최 관장이 더 이상 북한을 다녀올 수 없어서 지적등본 건은 무위로 끝나버렸다.
만약에 순안공항의 지적도를 떼볼 수 있다면, 그리고 과거의 사실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할아버지가 땅을 사서 일제에 되판 증거자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할아버지가 사신 순안공항 땅에 대한 증명을 하지는 못했어도 나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고 그 땅을 일제에 헌납하지 않고 되 파신 것은 정말 할아버지다운 결정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예스까 노까(yes냐 no냐)’의 선택을 강요당하면서 예스 혹은 노만 답인 줄 알고 처신한 예가 비일비재하고 그 결과 친일파와 독립지사의 극단을 오가며 운명을 바꾸게 되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예스도 아니고 노도 아닌 현명한 대답을 하심으로써 할아버지는 한편으로는 독립운동가로서의 자존심과 지조를 잃지 않으셨고, 또 한편으로는 친일부역의 누명을 쓰지 않으셨으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었는가? 할아버지의 선택의 순간이 가슴에 느껴질 때마다 나는 오로지 감탄해 마지않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