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부터 1908년 사이, 국민들의 모금으로 국채를 갚기 위해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은 전 민족적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당시 대한제국이 안고 있던 (주로 일본에서 도입)외채 1300여 만 원을 갚기 위해 민간차원에서 모금활동을 벌인 운동으로 115년 전 이 땅, 경주에서도 거세게 전개됐음이 2018년 경주최부잣집에서 발견된 여러 관련 문서 속에서 증명된 바 있다(보다 자세한 관련내용은 본지 1400호, ‘경주의 국채보상운동’ 참고).
국채보상운동에 당시 경주지역민들도 선도적인 참여를 했던 문서 자료들로서는 단연회사경비분배기, 경상북도 경주군 금연회사 설립취지서, 광고문안, 경주국채보상의연금성책, 향교연성회사규칙, 국채보상금검사소 편지 등이 이를 방증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당대 여러 신문을 통해서도 전국적 국채보상운동의 열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경주의 국채보상운동에 관련한 보도도 많았다.
‘국채보상 의무를 다하려는 경주 군민들의 노력이 남다르다’, ‘관리에서부터 유생, 상인, 기생까지 모두 참여한 경주 국채보상’, ‘화적들도 국채보상으로 양민이 되다’, ‘경주군 여러 면리의 납부’ 등의 제목으로 경주국채보상운동 소식들이 실렸음을 볼 수 있었다. 송아지를 팔고 떡을 팔고 점 봐 준 돈을 납부하고 은비녀를 팔아 이 운동에 동참했던 경주 민초들의 충정이 고스란히 기록으로 전해졌다. 당시 발행된 각 신문에 게재된 기사 중, 경주국채보상운동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짐작할 수 있는 기사를 모아 살펴보았다. 경주국채보상운동에 관한 기사가 실린 신문들을 취합해 정리하고 자문해준 (사)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와 최혁 연구위원께 깊이 감사드린다.
-경주국채보상운동에 관한 기사는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만세보’에서 찾아 볼 수 있어 국민이 담배를 끊어 그 성금을 상환해 독립의 기초적 실력을 튼튼히 하고자 전개된 이 운동은 1908년 초까지 전국으로 확산됐으나 일제의 방해와 탄압으로 좌절됐다. 이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07년 4월부터 12월까지였다. 특히 6월~8월에는 가장 많은 의연금이 모아졌다.
한편, 국채보상운동은 대한매일신보(1904. 7. 18~1910. 8. 28, 타블로이드판으로 6면의 일간지), 황성신문(1898. 9. 5~1910. 9. 14, 국권피탈 이전의 대표 일간지로 이 신문에서의 의연금 게재는 ‘국채보상의무금집송인원급액수’에 실림), 만세보(1906. 6. 17~1907. 7. 22, 천도교의 기관지로 창간됐으나 민중의 계몽에 창간 목적을 둠), 공립신문 등에 기사가 실렸다.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를 제일 먼저 보도한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였다. 국채보상운동의 취지서가 신문에 실리자 이에 호응해 의연금이 신문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중앙의 여러 신문들이 국채보상취지서를 게재하고 국민들의 동참을 호소하자 전국각지에서 불길처럼 호응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당시 고종 역시도 동참하는 뜻으로 단연했다. 이렇듯 국채보상운동의 시작과 국채보상취지서, 의연금 명단 등과 관련된 소식들이 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국채보상을 위한 모금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것.
특히 운동본부 역할을 한 대한매일신보에 가장 많은 기사가 실렸으며 다음으로 황성신문, 만세보, 제국신문의 순으로 보도됐다. 경주국채보상운동에 관한 기사는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만세보에서 찾아 볼 수 있었고 공립신문에는 보도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경주국채보상운동에 관한 어떤 내용들이 당시 신문들에 보도됐을까. -만세보 1907년 4월 27일자에 실린 ‘경주군 금연회사 설립과 취지서’
금연회사설립, 경상북도 경주군 사는 전교리 이중구, 전참봉 최현식씨 등 수 십 인이 국채보상사에 대하여 금연회사를 조직했는데 그 취지서가 다음과 같다.
‘우리 금연 동맹이여! 일찍이 듣지 않았습니까. ... 우리나라 외채가 1300만원에 이르렀으니 지금 갚지 않으면 장차 갚기 어려운 상황에 이를 것입니다. ... 국가의 수치와 백성의 치욕이 오늘이라도 닥칠 것인데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담배를 끊어 빚을 갚을 목적의 단체가 달부(대구)에서 만들어져서 서울에서도 모임이 이뤄졌습니다. 나라를 위한 소박한 정성이 궁궐에 닿아 대황제 폐하께서 담배를 끊으시니 무릇 우리 백성이 황송하여 눈물이 흐릅니다. ... 동포여! 이러한 사연을 한 번 전하고 두 번 전하면 천 명이 깨우치고 만 명이 깨우치게 되고 일 원 이 원이 모이면 몇 천원 몇 만 원이 되나니, 이러한 의무를 빨리 이루어서 우리가 스스로 가다듬을 기초를 회복한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광무 11년 음력 2월 5일’
-만세보 1907년 4월 28일자에 실린 ‘국채보상 의무를 다하려는 경주 군민들의 노력이 남다르다’ ‘경주 군민들의 국채보상 의무가 남다르다. 경주군 주민 여러 명이 국채보상의무금을 그 군의 금연회에 납부하니 그 의무심이 특히 열렬하다는데 강서면 김득철은 송아지 판 돈 일백 냥을 냈고 동몽 이성률은 올해 삼십에 고용임금 30냥이요. 양학봉은 가옥 2칸을 팔아서 가액 25냥이오. 강동면 김갑의 처는 떡을 판 돈 10냥이오. 강서면 정여복은 점을 봐주고 받은 돈 10냥이오. 내동면 구황리 한성문의 처 이씨는 은비녀 한 개요. 거창군 과객 허형두씨는 경주에 왔다가 국채보상하는 것을 듣고 짚신 판 돈 1냥을 마련하였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12일자에 실린 ‘관리에서부터 유생, 상인, 기생까지 모두 참여한 경주 국채보상’ ‘오늘의 기쁜 소식, 경주군 주사 김한은 씨가 국채보상의 일을 열심히 했는데 우선 담배를 끊기로 결심하고 경내의 상인들을 결탁하니 김덕헌, 김주복 등 단연을 동맹한 자가 30여 명이고 한편으로 선비 고을 우리 경주를 권기하여 국채보상동지회를 규합하였으니 같은 군의 관리와 기생 등도 각각 그 무리들에게 모이자고 연락해 의연금을 모집하는 자가 허다하다더라’.-황성신문 1907년 6월 7일자에 실린 ‘경주 각 동네, 기생과 무녀의 국채보상’ ‘경주군 단연상채회에서 김시권, 손명순 씨가 읍성 아래 각 동네 사람들에게 열심히 권유하고 지도해 제1회 모집의금을 대구상채회로 기송한 금액이 다음과 같다. 북정, 좌리, 황오, 노동, 북부, 동내, 황남, 나원, 성북, 보문, 서부, 재동, 성서리, 천북면, 손곡, 동문내, 청하 봉대면 광천리 이상 16동네의 합계 금 202환 64전.
남초상경중 합계 금 4환. 기생 옥련 몽금, 분향, 농옥, 금파, 기화 등 16명과 무녀 희이 1명 합계 금 18환. 이상 세 가지의 합계는 금 224환 64전’.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19일자에 실린 ‘화적들도 국채보상으로 양민이 되다’ ‘화적이 양민이 되다, 영천 경주 등지의 화적당이 도로에 방을 부쳤는데 ‘지금 국채보상에 대하여 귀천과 남녀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의연을 하고 있는데 어찌 우리들만 이와 같이 양민들을 침해하겠는가. 지금 이후로 우리들도 양민이 되어 국채를 보상하기를 원하니, 만일 이전과 같이 악행하는 자가 있으면 우리들이 함께 공격할 것이다’ 하였으니...’-황성신문 1907년 5월 24일자에는 ‘소를 팔고 새경을 맡기고 가산을 변통해 국채보상을 한 소식’ ‘영남에서 온 사람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번 국채보상을 맞아 경주군 구강리 김득철 씨가 농사짓는 소를 팔아 40원을 준비했고 그 고을 강서면의 고용인 이동씨는 새경으로 받은 돈 6원을 주인집에 맡겨 놓았고 합천 사는 정사용 씨는 가산을 변통해 100원을 대구단연상채회로 보내 납부했다고 하니, 이 세 사람의 국민 된 의무는 과연 감탄하겠더라’.
-대한매일신보에 가족과 개인 참여 기사와 경주군 상무소국채보상단연동지회의 참여 소식 실려, 황성신문에선 황남리 주민의 국채보상 참여 소식 알려 대한매일신보 1907년 5월 27일과 9월 13일자 등에는 부내면 황남리 김한근씨 가족의 납부소식과 경주 박인순씨의 납부 소식이 게재돼 있다.
또 1907년 5월 24일자에는 경주군 상무소결성회와 상무소국채보상단연동지회의 참여 소식도 실렸다.황성신문 1907년 6월 21일자에는 경주 부내면 황남리 주민의 국채보상 참여를 알 수 있도록 주민들의 이름과 납부한 금액이 게재되었다. ‘김종헌 10환, 김기욱, 김기일 각 1환, 이규복, 백성채, 김우진, 이팔용 합 2환18전...’ 등으로 개인이나 여럿이서 합한 돈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대한매일신보 1908년 1월 9일, 2월 8일자에서는 ‘경주군 여러 면리의 납부’라는 제목으로 ‘1월 3일 경주군 각 면리 39환60전, 1월 4일 경주군 각 면리 59환42전...’ 등으로 납부했음을 실었다. 그리고 ‘경주 국채보상 의연금 서울 본부 납부’ 기사가 대한매일신보 1908년 월 30일자에 국한문판 기사와 한글판 기사 모두에 실렸다. 경주 국채보상금을 재무 임천식의 아들 임휘태가 서울 본부에 납부했음을 확인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밖에도 경주국채보상운동에 관한 기사가 더 실렸으나 지면에서 모두 소개하지 못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