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두 폐사지가 지리했던 복원을 마무리하고 일반에 더욱 다가왔다. 원성왕의 원찰이었던 숭복사지(崇福寺址)와 김유신과 기생 천관의 이야기가 전하는 천관사지(天官寺址, 사적)가 그것이다. 그 예전 영화를 누렸던 숭복사에는 양 탑의 기단부에 팔부신장이 새겨져 있어 원찰의 위엄을 갖추고 있는 금당지 앞 두기의 탑과 석조 부재들이 남아있다. 교동 천원마을 주변의 너른 들판에 복원된 천관사지 아름다운 삼층석탑에도 따스한 온기가 더해졌다. 그러나 두 곳에서의 석탑들의 복원과 정비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시선이 교차했음도 숨길 수 없다. 두 폐사지는 예나 지금이나 말이 없다. 그저 후손들의 손에 그 정체성을 맡길 수밖에 없다. 숭복사지와 천관사지 모두 사람들의 발길이 오래도록 머물러 방문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위로처로서의 유적이 되길 바라본다.
-경주 천관사지(天官寺址, 사적)… 김유신과 기생 천관의 이야기가 전하는 곳으로 5년여 천관사지 정비사업 진행 경주 천관사지는 도당산 기슭 논 가운데 있는 절터로 김유신과 기생 천관의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수 년째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고 이제 복원 전의 그 천연덕스러웠던 풍광들은 사라져버렸지만 이내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을 것이라 생각하니 다소 위안이 됐다. 천관사지삼층석탑의 기단부와 몸돌 일부에는 석재로 훼손된 부분을 메꿔 놓았는데 최근 복원한 흔적이 역력했다. 이른 겨울 저녁 찾은 천관사지의 주변 집들에서는 별들처럼 반짝이는 불빛들이 ‘천관’의 애달픈 사랑을 따스하게 달래주는 듯 했다.
고려중기 이인로가 지은 파한집에 천관사에 관한 설화가 전한다. 청년시절 김유신은 기생 천관과 사랑에 빠져 지내다 어머니의 꾸중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으리라 맹세한다. 어느 날 김유신의 말이 술에 취한 그를 천관의 집 앞으로 데려가자, 김유신은 말의 목을 베고 냉정하게 천관을 뿌리친다. 이를 슬퍼한 천관이 목숨을 끊었고 이후 김유신은 천관이 살던 집에 천관사를 지어 그녀의 명복을 빈다. 창건 이후 절의 역사는 알 수 없으나 동경잡기에 고려 중기의 이공승이 천관사를 지나면서 지은 시가 전한다.
천관사는 2000년부터 수 차례 주변을 발굴 조사해 천관사 건물터와 탑의 터, 우물 등을 확인한 바 있다. 경주시는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간에 걸쳐 천관사지 정비사업을 진행했다. 15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건물지를 정비하고 석탑 복원, 탐방로 정비, 조경과 관람편의시설, 야간조명등 설치 등의 내용으로 복원정비사업을 한 것이다. 이와 함께 천관사지의 금당지와 강당지, 추정승방지, 문지 등의 건물지에 대한 주춧돌과 지대석들을 제 위치를 찾아 자리에 두고 잔디를 심어 천관사의 범위를 드러나게 한다는 것이 주요 사업 골자였다.
-천관사지 삼층석탑…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3층 옥개석의 진위 여부 때문에 한때 공사 중단되기도, 삼층석탑은 사각기단에 팔각탑이 올라가있는 이형탑(異形塔)으로 복원 특히, 천관사지 삼층석탑을 복원 중이었는데 천관사 탑도 2020년 복원 완공이 계획이었지만 복원 과정을 둘러싸고 학계와 경주시간 이견을 보여 준공이 늦어져 최근 마무리됐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3층 옥개석의 진위 여부 때문에 한때 공사가 중단되었던 적도 있었다. 결국, 남아있던 탑의 몸돌과 바닥돌 부재를 참고해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팔각형의 몸돌을 얹은 삼층석탑 1기를 복원했다. 이 탑은 지붕돌 밑면의 받침이 연꽃 모양으로 된 점이 독특하다.
천관사지 석탑지는 8매의 지대석 위에 갑석(甲石)이 얹힌 상태로 탑의 하층 기단이 완전하게 확인되었다. 갑석 상면에는 각형의 2단 탑신받침이 평면 팔각으로 각출되어 있는데 받침의 형태로 보아 1층 탑신은 팔각이다. 따라서 탑의 전체 형태는 사각기단에 팔각탑이 올라가있는 이형탑(異形塔) 임을 알 수 있다. 옥개석(지붕돌)은 1매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상륜부의 보륜으로 추정되는 석물 1매가 건물지 1북쪽의 배수로에서 출토되었다.
천관사지 삼층석탑은 2층 방형 기단 위에 8각 3층 구조의 이형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최초로 나타난 형식이어서 주목받았으며 옥개석 또한 연화문이 새겨진 아름다운 형식의 팔각지붕으로 눈길을 끈다.
-경주 숭복사지(慶州 崇福寺址)… 숭복사지동서삼층석탑은 부족한 부재 보충하지 않은 채 복원하고 기단부에는 이질적인 석재로 훼손된 부분 보완해 숭복사지는 괘릉(원성왕릉)에서 걸으면 거의 30여 분 걸리는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동쪽 토함산 자락에 위치한다. 숭복사지도 최근 복원과 정비를 마쳤다. 정비 후 예전에 비해 더욱 휑한 풍경인 듯 했다. 숭복사지동서삼층석탑은 여전히 부족한 부재를 보충하지 않은 채 복원공사 전 그대로의 모습이었으나 기단부에 이질적인 석재로 훼손된 부분을 메꾸어 놓은 것이 크게 달라진 점이다.
다소 불안했던 삼층 석탑의 구조도 조금은 안정된 모습이었다. 숭복사지 금당지 앞에는 감나무를 한 그루 남겨 두었고 남쪽 방향으로 두 기의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옛 사지 주변에는 초석과 사찰에 사용되었을 석재들이 정비돼 있고 금당지에도 당시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석재들이 남아있다. 정비 이전, 과수원 한 가운데서 나무에 둘러싸여있던 두 기의 석탑과 금당지는 그나마 확 트여 전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무너져있던 석탑이 지금의 모습으로 세워진 후 도괴의 위험이 있어 두어 번 유지보수작업이 있었지만 전면해체 복원작업이 2년여 이뤄진 것은 처음이었다. 복원 작업이 끝난 탑지 주변에는 허연 마사토가 뿌려져 있어 자연과 동화되었던 폐사지로서의 풍광은 사라져 버렸다.
언제쯤 자연스러운 풍광으로 자리잡을지 ‘멋’이 사라지고 없는 절터를 한참을 맥없이 바라보았다. 숭복사는 괘릉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괘릉의 주인을 속시원하게 밝혀준 이곳은 선덕왕 이전 파진찬 김원량이 창건했다. 당시 이름은 곡사, 혹은 동곡사였다. 조선 이후 이곳은 거의 잊혀지면서 숭복사라는 고유한 이름을 잃은 채 이곳 지명을 따서 ‘말방리절터(말방리사지, 末方里寺址)’라는 이름으로 전해왔다. 1931년 입실소학교에서 소풍을 왔는데 그때 깨진 비편을 발견하고 당시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있던 조선금석총람과 대조한 결과 이곳이 숭복사 터임이 밝혀졌다. 다시 숭복사의 정체성을 되찾은 것이다.
-지금의 원성왕릉 자리에 있던 ‘곡사(鵠寺)’를 이곳으로 옮겨와 ‘대숭복사(大崇福寺)’로, 2014년 ‘초월산 대숭복사비’ 복원 숭복사지는 지금의 원성왕릉 자리에 있던 ‘곡사(鵠寺)’를 이곳으로 옮겨와 ‘대숭복사(大崇福寺)’ 라고 했는데 최치원이 절을 옮기게 된 배경과 과정을 ‘초월산 대숭복사비’에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숭복사비는 진성여왕 10년(896)에 세웠으며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이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숭복사(崇福寺)’는 원래 원성왕의 어머니인 소문왕후의 외삼촌이자 원성왕비인 숙정황후의 외할아버지인 파진찬 김원량이 창건한 ‘곡사(鵠寺)’에서 기원하였다.
그 뒤 원성왕릉을 곡사에 만들면서 사찰을 지금의 숭복사터로 옮겨 새로 세웠다. 후에 경문왕이 꿈에 원성왕을 뵙고 사찰을 크게 수리하여 왕릉의 수호와 왕의 명복을 빌게 했다. 헌강왕 11년(885)에 절 이름을 곡사에서 숭복사로 바꾸고 다음해,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도록 했는데 진성여왕 10년(896)에 가서야 완성되었다. 일찍이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이나 탁본도 전혀 전하지 않으며 비석을 받쳤던 쌍귀부와 비편 몇 조각만이 전하고 있었다. 이에 경주시는 2010년부터 2013년까지 필사본으로 전해져오던 비문을 교감(校勘)하고 행렬을 맞추어 최치원이 짓고 쓴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의 글씨를 이용, 비문을 집자해 새겼다. 또 숭복사비의 쌍귀부는 일제강점기 때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관리되고 있는 원품을 그대로 복제했다. 없어진 이수도 고증해 2014년 금당지 남쪽에 비석을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381cm, 비신의 높이는 204cm, 두께는 33cm, 폭 100cm다.
숭복사지 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94호)은 숭복사 터의 금당지 앞에 동서로 서 있는 쌍탑이다. 두 탑은 동일한 규모와 형태로 2층의 바닥돌 위에 3층으로 몸돌을 올렸으나 동탑은 2층 몸돌과 머리장식 부분이 없어졌고 서탑은 1층과 2층의 지붕돌만 남았다. 바닥돌의 위층 네 면에 2구씩 팔부신중상을 새겼고 1층 몸돌에는 문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의 아래 받침은 4단이다. -꼼꼼한 복원에는 미흡… 자칫, 경주시의 이중 예산 낭비로 이어질뿐더러 방문객의 불편을 초래하는 점에서 이번 복원의 한계 지적 한편, 이들 두 건의 폐사지 복원을 두고 시민들과 전문가들이 아쉬운 점을 몇 가지 꼽고 있다. 우선, 숭복사지 탑의 복원 시 서탑은 몸돌을 그대로 포개어두고 동쪽 탑은 그렇지 않은 것에서, 혹여 재복원의 여지가 제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몸돌을 포개놓을 것이 아니라 그 비례를 추정하고 찾아서 이번에 복원했어야 하며 또 몸돌과 옥개석 사이에 간격(구멍)이 보여 꼼꼼한 복원에는 미흡하다는 것. 이는 자칫, 경주시의 이중 예산 낭비로 이어질뿐더러 방문객의 불편을 초래하는 점에서 이번 복원의 한계를 지적했다.
천관사지 탑의 경우도 옥개석이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데 진위 논란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도 아쉬운 대목으로 꼽았다. 추후에라도 진위가 명확히 밝혀진다면 박물관 석재를 사용해 복원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 두 복원지의 석탑 기단부를 기존의 탑재와는 다른 석재로 보완해 메꿔 복원해 보기에 불편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 시민은 “복원의 흔적을 남기고 후대에 보여주려고 한 것 같은데 유럽 석조건물의 경우, 전체가 큰 석조건축물이어서 다른 석재로 복원했음을 보여준다고 하지만 작은 석조물인 탑의 경우엔 복원 시 다른 재질과 색으로 복원해 보기에 좋지 않다는 겁니다. 커다란 석조 건물과는 경우가 다르다고 봅니다. 수 백 년이 흘러도 얼룩덜룩한 지금의 모습으로 남을 것인데 차라리 비슷한 재질과 색깔의 석재로 기존의 탑재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복원했으면 좋았겠습니다” “복원 전후를 굳이 알리고 싶었다면 작은 안내판에 복원 전후의 사진으로 비교해 모습의 변화를 설명하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이왕 복원하려면 예산을 충분하게 확보해서 한꺼번에 제대로 해야하는데 이중 삼중의 복원경비와 과정에서의 불필요한 낭비를 우려한 의견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