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큰 별이 또 하나 지고 말았다. 우경(偶耕) 윤광주(尹光柱, 1945~2021) 선생이 오랜 지병 끝에 77세를 일기로 지난달 20일 별세했다. 우경 선생은 영원한 신라인이자 문화인이었던 고청 선생의 자제로서, 고청의 열정과 뜻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구현한 이다. 부친인 고청 선생의 평생노력을 헛되지 않게 하려는 작업과 함께 유물과 유적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수많은 문화재를 복원하고 복제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영역으로의 작업의 확대 발전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전국 국가 박물관은 물론 문화재 관련기관과 일반 사업장의 주요 유물복제 제품과 옛 현장 재현은 거의 선생의 손길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일련의 작업들은 선생의 끊임없는 연구와 열정, 노력 덕분이었다. 경주 토박이로서 고청 선생의 업적을 고청기념관으로 이어가는 그의 행보는 열정적이었지만 소박했다. 그런데 약 한 달 여 기념관 준공을 앞두고 위태롭던 선생의 건강이 결국 무너졌다. 상량식은 보았지만 준공을 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한 우려가 적중했던 것이다. 미완의 유업만 남겨둔 채다.
지난 8월 24일, 그토록 염원하던 고청기념관 착공 직후 이뤄진 선생과의 인터뷰는 이제 마지막이 되었다. 그날 유난히 음성이 낮고 잦아들어 선생의 건강이 무척 걱정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부친인 고청 선생의 업적을 제대로 조명할 수 있는 공간에의 기대감을 비추며 희망을 이야기했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문화의 현장에선 아프고 고단한 몸을 이끈 선생을 거의 예외 없이 만날 수 있었다. 선생은 문화예술을 최우선으로 꼽으며 기여하기를 바랐고 또 큰 공로를 세우고 떠났다.
유족들은 매주 일요일마다 49제를 올리고 이제 막, 3제를 지냈다고 한다. 유족들은 번갈아가며 고택을 방문하고 조용하게 유업을 받들기 위해 의논하며 고심하고 있다. 한편, 49제를 마칠 즈음 현재 남산 자락에 묻혀있는 고청 선생 부부와 함께 우경 선생도 유족이 마련해 둔 내남면 비지리 땅에 묘소를 새로 마련할 예정이라고 한다.
-오랜 시간동안 기념관 건립 염원하고 애타게 기다려왔기에 준공까지 보고 가시기를 기도했으나 결국 영면에 들어 때로는 시기가 너무 늦어져서 그 의의와 가치가 손상되는 일들이 더러 있다. 하물며 그것이 어떤 선각자의 정신을 기리는 일 일 때면 더욱 한탄스럽다. 우리 지역에서는 고청기념관 건립의 건이 그 대표적 사례였다. 지난 8월 20일에서야 우여곡절 끝에 양지마을 고청고택 바로 옆 부지에서 개토식을 시작으로 기념관 건립의 그 첫걸음을 알렸었다.
우경 선생은 생전에 “2019년 폭우를 동반한 태풍으로 아까운 기록들이 얼마나 유실됐는지 몰라요. 비닐하우스 안에 보관돼있던 서적과 자료들이 속수무책으로 물에 잠겼었지요. 그러니 기념관 건립이 늦어진 것이 원망스럽기끼지 했어요. 그전에 지었더라면...,”라고 하면서 안타까워했다.
기념관이 착공은 되었으나 당시 지병이 부쩍 악화되었던 선생의 소회는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선생의 얼굴에서는 기념관 건립을 두고 진척에 어려움을 겪은 그간의 마음고생을 읽을 수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기념관 건립을 염원하고 애타게 기다려왔기에 준공까지 보고 가시기를 기도했으나 결국 영면에 드신 것이다.
-“참 좋은 친구이자 예술가, 문화인을 잃어버렸어요. 문화재를 가장 흡사하게 되살리는 전문가를 경주가 잃어버린 것입니다” 50여 년간 우경 선생의 절친한 지기이자 고청기념사업회 김윤근 회장은 “우경(偶耕)은 그의 아호입니다. 허재비 우, 인형 우(偶)에 갈 경(耕) 자인데 흙 인형 만들고 신라 토우를 만든다고 그리 지었다고 합니다. 그 호에 자신의 갈 길을 담아 둔 것 같아요. 몸을 굽혀 흙을 빚어 토우를 만들고 밭과 논을 가꾸는 것처럼 문화와 예술을 일구는 일을 하겠다는 다짐이었겠지요. 우경의 정신이 거기 깃들어있는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신라문화를 아끼고 사랑했던 국내최고의 유물복원전문가였습니다. 한국 최고의 전문가였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경주에서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물을 복원하고 재현했던 열정과 의지를 저에게도 알리고 의견을 나누었던 우경이었습니다. 참 좋은 친구이자 예술가, 문화인을 제가 잃어버렸어요. 문화재를 가장 흡사하게 되살리는 전문가를 경주가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아직 매일 전화가 올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기리는 연구관을 잘 짓기 위해 그렇게 애썼잖아요. 기념관 지붕의 맨 끝 기둥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 다음날 운명했는데, 고청기념관 완공에 대한 자세한 구상과 계획을 전하고 떠났습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원했던 기념관 준공은 보지 못하고 떠났으나 그의 혼과 정신은 기념관에, 그가 만든 예술품에 살아남아 영원하리라 생각합니다” 김 회장은 이어 “워낙 어린시절부터 부친이었던 고청이라는 거목의 큰 그늘 아래 있었고 아버지의 정신과 혼을 배워서 문화재를 복원하고 재현했지만 경주에선 덜 알려진 측면이 있습니다. 늘 고청이라는 아버지의 그늘을 욕되지 않게 하려고 애썼지요”라고 말했다.
“기념관이 완공되면 고청 선생은 물론, 우경의 정신을 기리는 각 자료들도 함께 구성할 계획입니다. 아쉬운 것은 여러 공적과 기여에도 그의 생전에 아무런 시상이 이뤄지지 않은 것입니다. 고청기념관이 준공될 즈음 작은 문화상이라도 시상하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질 않았습니다. 고인이 된 이후지만 그의 공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도 마련할 생각입니다”
“경주에 살면서 많은 일을 했으나 그의 업적을 미처 다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기술적으로나 문화예술적으로도 조상님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 노력한 친구입니다. 몸 굽혀 문화를 일깨우려 최선을 다한 친구였습니다”
-경주읍성 재현 등 문화재 복원 및 복제 사업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워...역작인 광개토왕비는 실물 크기 그대로 완벽하게 복제 우경 윤광주 선생은 1945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4살 때 부친인 고청 선생의 손에 이끌려 경주로 내려왔다. 경주의 문화 일꾼을 길러낸 ‘고청 사숙’, ‘경주어린이박물관’이 뿌린 씨앗들 중 윤광주 선생도 있었다. 선생의 만만치 않은 이력처럼 유물 복원복제 전문가라는 수식이 있는데 고청 사숙, 어린이박물관학교를 거치면서 배우고 익힌 눈썰미가 바탕이 되었다. 경주고를 졸업하고 홍익대 공예과에 진학했으나 집안에 닥친 우환으로 공부에 전념치 못했고 가구 공장 디자인 실장직을 맡았다. 군을 제대하자마자 서울에서 옹기와 전돌 등을 굽는 공장을 차렸고 테라코타 기법을 연구하며 각종 장식과 건축 일에 나섰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복원 복제 쪽으로 전향해 일생을 매진해 왔다. 1974년 선생의 첫 작품인 한국 최초 대형 테라코타를 만들었다. 이후 경주읍성 재현 등 문화재 복원 및 복제 사업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통일전 벽면 부조(1975), 부산코모도호텔의 고대문양(1977), 국립경주박물관 선덕대왕신종 전면문양(1981), 잠실롯데민속박물관 석굴암 재현과 석기유물(1984), 국립진주박물관 가야의 마갑과 갑주(1985) 등 수많은 유물복제 작업을 했다.
용산전쟁기념관 역사관의 화포를 재현한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의 복원, 경주사람 이장손이 만든 비격진천뢰도 복원했다. 관련 전문가들은 선생의 솜씨를 칭찬하고 그 실력을 인정했다. 특히 주목할만한 작업은 1982년에 제작한 실물크기 그대로였던 광개토왕비, 황룡사치미, 금동대탑 등 여러 유물을 실물 크기 그대로 완벽하게 복제 제작했다. 이들 작품들은 지금도 독립기념관에서 참배객을 맞이하고 있는 선생의 자랑스런 작품들이다.
특히 광개토왕비는 선생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유물복제전문가로 그 명성이 자자할 때였다. 이 제작을 위해 중국 지안(集安)에서 현지 전문가 도움을 얻어 대왕비 보호각 문을 걸어 잠그고 사흘 밤낮 비석을 실측하고 그를 토대로 실물 그대로 대왕비를 복제해 독립기념관에 안치한 일은 선생의 혼과 솜씨를 담아 웅장하고 당당하게 구현해낸 역작이었다.
한편 소설가 최인호와 작업한 ‘잃어버린 왕국’ 다큐 영상 작업을 같이 하기도 했다. 경주민속공예촌을 건설해 우리의 문화재를 복원할 공간을 만들었던 것도 선생의 디자인이었다. 또 신라대종 조각의 방향과 디자인 문양 부분(단청 부분 포함)에 자문위원을 맡으며 신라적 단청의 해법을 제시했다.
그러니, 전국 국가 박물관은 물론 문화재 관련기관과 일반 사업장의 주요 유물복제 제품과 옛 현장 재현은 거의 선생의 손길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일련의 작업들은 선생의 끊임없는 연구와 열정, 노력 덕분이었다. 고서란 고서는 다 뒤적이며 고청의 가르침과 자신의 부단한 노력 끝에 나온 최고의 경지였다.
-에필로그...‘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우경 선생과는 각별했다. 지역의 여러 문화현장과 현안에 대해 늘 애정을 가지고 자주 제보 전화도 해 주셨던 분이었고 자문을 구하는 인터뷰라도 할라치면 전해줄 메세지를 일일이 연필글씨로 써서 함께 전해주곤 하셨다.
“선 기자, 오늘 기념관 기둥 올라갔데이!” “네! 선생님, 곧 한 번 다니러 가겠습니다”
그 통화 사흘 뒤 선생은 영면에 드셨다. 바람 앞에 촛불 같이 하루하루 겨우 버티시다가 결국 고청기념관 준공도 보지 못하고 황망히 떠나시니 안타까운 소회 금할 길 없다. 세간에선 그래도 착공이라도 보고 가셨으니 다행이라 하는데 그것으로나마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기념관이 완공되면 고청 선생이 아이들에게 즐겨 이야기를 들려주던 대청마루에선 다시 어린이들과 후학들의 토론과 담소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우경 선생도 그들 틈에서 예의 그 자상한 미소로 함께 계실 것 같다. 고청기념관이 세워지면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면서 소박하고도 한결같이 염원했던 선생은 가고 없지만 그 정신과 혼은 후학들에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다.
선생은 늘 대학노트 한 권과 노트 사이 펜을 끼워 다니시며 메모를 즐기던 분이었다. 베레모를 즐겨 쓰고 다소 구부정한 모습으로 천천히 걸으며 기나긴 항암치료에도 언제나 자상한 미소를 머금으며 체화된 귀족적 풍모로 멋을 냈다.
수년 전 어느 봄날 모처럼 황사와 미세먼지에서 모처럼 벗어나 활짝 개인 하늘을 보며 “저 하늘 좀 봐봐. 이 미풍은 또 어떻고!”라며 맑게 걷힌 하늘을 올려다보던 선생의 그윽한 눈길을 잊을 수 없다. 자연을 예찬하며 평생 골몰했던 문화와 예술에 대한 동경과 탁월한 식견과 탐미는 선생의 일생을 관통했다.
이제 선생은 가고 안계시니, 선생의 외롭고 고단했던 발자취를 한 줄 기록으로나마 선생의 영전에 갈음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