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문사진작가 오세윤(58)은 그의 경력과 ‘업적’에 비해 크게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경주에 살면서 40여년간의 사진작업을 하는 동안 지난 2013년 서울에서 ‘신라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첫 개인전을 가진 것에 그친 정도다. 신라 천년의 시간을 되짚어 보았던 전시에 이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10월 3일까지 진행되는 ‘천년 묵은 옛터에 풀은 여전히 새롭네’전에 참여하고 있으니 기나긴 사진 작업 끝에 고작 두 번째 전시를 가지는 셈이다. 이번 전시는 그간의 노고와 그가 흘린 땀의 결실의 일부로 오롯한 결정체로 구현됐다. ‘사진가는 카메라 뒤에 있어야 한다’며 매스컴에 오르내리기를 꺼려했던 이유일까. 책자에 ‘사진촬영 오세윤’이라는 이름 외에는 노출되는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일까. 문화유산계에서 오 작가는 문화재 전문사진작가로 통하고 국립박물관이나 문화재청에서 나온 보고서나 도록에 실린 무수한 사진이 그의 손을 거쳐 발행된 것에 비하면 그의 명성은 그리 높지 않다. 전업 사진작가라면 종종 겪는 경험담이겠지만, 드론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경비행기를 타고 항공촬영을 하기도 했다. 큰맘 먹고 장만한 1억짜리 카메라가 박살나 애를 태우기도 했고 남산탑골마애상 촬영 때는 뱀에 물려 혼비백산했다고도 한다. 좋은 사진 찍겠다며 국내 문화재 현장은 물론, 타클라마칸 사막 모래밭을 휘젓고 다니기도 했다. 그런 그가 2002년부터 촬영을 해 지금까지 발간한 책이 193권이라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도록의 면면에선 수많은 그의 작품너머 감지되는 굵은 땀방울을 읽을 수 있다. 천년 고도인 경주의 오늘에 자신이 서 있으며 옛 신라로부터 계승해 내려온 역사와 정신을 되짚어 기록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작가 오세윤을 드디어 만났다. -‘천년 묵은 옛터에 풀은 여전히 새롭네’전 국립경주박물관 10월 3일까지...문화재 사진작가 3명이 전하는 경주의 불교 유적 전시에 경주작가 오세윤 작품 다수 출품 문화재 전문사진작가인 고(故)한석홍 선생과 안장헌 작가, 오세윤 작가가 촬영한 경주 불교유적 사진을 선보이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문화재 사진작가 3명이 카메라에 담은 경주의 불교유적 사진 작품 57점으로 꾸민 특별전 ‘천년 묵은 옛터에 풀은 여전히 새롭네’를 오는 10월 3일까지 선보이고 있다. 한 달여 남은 전시를 아직 보지 못했다면 서둘러 챙겨 보아야 할 전시로 이번 특별전은 올해 말 신라미술관 고대사원실 개편에 앞서 신라 불교미술에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초석으로 기획되었다. 특히 이번 전시에 참여한 오세윤 작가는 경주에 살고 있는 경주사람이어서 더욱 애착이 간다. 지역민으로 국립박물관에서 작품을 선보이는 것에 시민들은 주목하고 있으며 환영일색이다. 오 작가는 “남사리 절터에서는 쏟아질 듯한 산세를 등지고 서 있는 석탑을 관망하고 장항리 절터에선 역사(力士)가 지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죠. 나원리 절터에선 탑이 하늘을 우러러 보는 모습을, 미탄사 터에선 황량한 절터에 저물어갔을 신라를, 보문사 터 당간지주에서는 우두커니 솟아있는 지주가 매번 갈 때마다 한결같이 나를 지켜주는 듯한 느낌을 담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이번 전시에서의 단상을 전했다.   최선주 국립경주박물관장은 “박제돼 있는 유물을 관람하는데서 그 외연을 확장시키기 쉽지 않은 측면이 있는데 유물이 출토된 유적지에 대한 이해를 돕는 전시입니다. 박물관에서 다시 현장 유적지로 연결시키는 것이 바로 사진입니다. 문화재 전문작가의 명품사진은 역시 다르다는 것 또한 보여줍니다. 그동안 많은 작가들이 경주와 신라의 모습을 앵글에 담아왔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두 작가의 맥을 이어가며 경주에 살고 있으면서 찍은 오세윤 작가의 사진은 특별하지요. 지역의 작가가 역량을 증명할 수 있는 전시기획도 경주박물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라면서 이번 전시는 유물 관람 못지않은 큰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다고 전했다. -‘사진가 오세윤’이라는 이름으로 발행된 도록은 모두 193권, ‘경주 남산’ 도록은 세계유산 지정심의에 제출되기도 그는 올해도 경주남산의 불적 어제와 오늘(국립경주 문화재연구소), 견훤 새로운 시대를 열다(국립진주박물관)등의 촬영을 비롯해 비무장지대와 제주도까지 전국을 다니며 촬영 중이다. 일본 매장문화재 사진기술 연구회 회원이기도 한 그는 국립경주박물관 경주유적지도, 불교유적, 가마터 및 울산지역 불교유적 학술조사에 참여했고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유적(동화사, 은해사, 갑사) 학술조사에도 참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 남산 학술조사 자문위원으로 경주 남산(GYEONGJU NAMSAN) 도록을 촬영(1999∼2003)해 당시 도록은 세계유산 지정심의에 제출하기도 했다. 국립박물관 특별전 전시도록 촬영, 국립문화재연구소 보고서 유물 등 촬영, 지자체 박물관·연구원 전시도록·유물 등 촬영, 몽골, 멕시코 등 해외유적, 발굴현장 촬영, 북한 개성 만월대 발굴유적 촬영(총 4 회)을 진행했으며 전시로는 개인전 ‘신라를 찾아서’에 이어 올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전시를 하고 있다. 그의 이름으로 도록이 발행된 것은 지금까지 모두 193권에 달한다. 웬만한 전국국립박물관과 문화재연구소, 중앙과 지자체 등에서 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도록이 없을 정도다. -1990년부터 프리랜서로 문화유산 사진 촬영 시작, 가장 집중하는 테마는 ‘경주와 신라’ 문화유산 중에서도 그가 집중하는 테마는 ‘경주와 신라’다. 김천 태생이지만 1983년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 진학한 인연으로 경주에 정착하면서 40년 가까이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았던 것. 오 작가가 신라나 경주에 집중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대학 재학시절 특히 고전을 좋아해서 삼국유사나 금오신화의 원문을 읽는 과정에서 옛 신라에 매료되었고, 현장에 답사 가게 된다. 그 흔적들을 찾기 위해 오로지 지도 하나 달랑 들고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번갈아 타면서 답사를 다녔다고 한다. “1990년대 초만 해도 경주의 옛 모습과 문화재를 기록한 사진 중에 한국인이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후대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지금 기록을 남기고 전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졸업 후 경주시내에 있는 조그마한 사진관의 촬영기사로 10년간 일하며 떠나지 않은 것은 경주가 좋아서였다. 그즈음 사진을 관두고 싶을 때도 있었다고. 사진으로 경주서 먹고 살기 힘들어서였는데 그때 ‘버티자. 해보자’면서 굳건하게 잡아준 사람이 고(故) 이근직 교수였다. 한편, 목숨 걸고 찍은 사진이 한 두 장이 아닌 1990년대 경주 기록필름은 남아있지만 1989년~1997년까지의 약 10년간의 기록 필름이 없어진 일은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다. “50m 사다리차를 허공에 띄우고 올라가 사진 찍은 적도 있었죠. 바람이 불어도 거기 매달려 찍은 사진들입니다”  1990년부터는 프리랜서로 문화유산 사진 촬영을 시작했고 1997년부터 2001년까지 국립경주박물관에 채용돼 유물과 문화재를 사진에 담는 일을 맡게 됐다. 문화재를 알고 찍으니 아는 것만큼 보였고 유물 찍는 일을 5년 정도 자연스레 배우게 된 것이다. 박물관 근무 이후 유적지 등을 다니면서 유물 촬영을 하고 이것이 주업이 돼 오늘에 이르렀다. “일본총독부에서 나온 ‘조선고적도보’와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서적의 사진을 보며 지금 이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책임감이 생겼습니다”며 “목록만 들고 경주 전체를 3바퀴 정도 돌아 다녔지요. 하지만 당시의 사진은 찍고 돌아서기 급했었죠” 이에 회의를 느낀 그는 ‘깊은 사진’을 염두에 두고 경주 남산을 5년간에 걸쳐 필름카메라로 찍으면서 체계적인 작업을 하게 되었다. -“유물 사진은 가장 객관적으로 찍어야 하죠” “세월이나 시간을 머금은 유적에 ‘바람’을 함께 찍고 싶습니다” 촬영에 임하다보면 그때그때 무언가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들이 셔터를 누르게 한단다. “피사체인 유물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릴때 쯤이면 제법 높은 경지에 도달한 겁니다. ‘나는 이 시간쯤이면 가장 예뻐. 그러니 언제쯤 다시 와. 미련하게 기다리지 말고 내려가. 지금 찍지 말고’ 이렇게 유물들이 속삭입니다” 그가 피사체인 유물과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예전엔 하루 종일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렸다면 요즘은 많은 시간이 필요 없어요. 이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갔던 데를 가고 또다시 갔죠” 이렇게 베테랑이 된 그는 요즘은 촬영 요청이 오면 먼저, 목록을 보고 전시의 성격을 파악한 뒤 사진 한 장 만 봐도 그 전시의 정체성을 알 수 있도록 촬영에 임한다. “내가 정작 찍고 싶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월이나 시간을 머금은 ‘바람’입니다. 요즘은 장비가 좋아서 바람 찍기가 좋아요. 세월을 유적에다 입히기 위해 노력합니다만 잘 되지는 않아요. 고민이 끊이질 않아요” -“카메라 메고 경주의 산과 들을 뛰어 다닐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오 작가는 찍어놓은 필름을 보고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한다. 박물관 자료실의 필름을 보고 그늘, 그림자, 조명과의 관계를 필름을 보고 그려보고는 비슷한 유물을 찍어보고 현상해 비교해보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나아지지 않자 결국 큰 카메라를 사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는데, 우연찮게 작고한 경주의 문화재 사진작가 1세대인 최원오 선생의 카메라(린호프, Linhof)와 인연이 닿았다. 자제인 최용대 화백의 ‘사진가를 알아보는’ 멋진 결정이었다. “카메라만 받아온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사용하던 그 분의 정신을 가져오는 것과 같아서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가끔 초발심이 흔들릴 때 그 카메라로 찍어 보며 마음을 다잡습니다” 오 작가는 국내외를 종횡으로 다니며 촬영하느라 몸은 경주를 자주 떠나있지만 마음은 늘 경주에 있다고 한다. “제게는 신라라는 큰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경주의 산 같은 왕릉, 남산의 바위 곳곳에 새겨진 불상들 이 모든 것들은 제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카메라를 메고 경주의 산과 들을 뛰어 다닐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제가 사는 서라벌의 속살을 제 눈으로 담아내고자 합니다. 경주가 있고 신라가 살아있는 한 제 작업은 계속 될 것입니다” 그의 작업이 신라에, 경주에 진 빚을 갚는다고 하는 연유다. -“사진가로서 이루고 싶은 작업 중 하나는 바로 ‘신라의 완성’” “원 없이 제 사진 찍어보는 것이 꿈입니다. 앞으로는 제 자신 스스로 매료돼서 해보고 싶은 몇 가지 작업이 있습니다. 북한 문화재 촬영, 실크로드 촬영, 남극 촬영, 남미 루트를 동한 우리와 닮은 문명 찾는 촬영도 하고 전시도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미 이들 피사체에 접근하는 루트나 방법, 인맥을 넓혀놓은 터라 여러 경험을 통해 기획을 시도하고 싶다고 했다. “다리 힘은 점점 빠지고 도전해보고 싶은 사진 작업은 많군요(웃음)” “마지막 작업이(카메라를 메는 일은 늘 마지막이라 생각한다)라 생각하고 임합니다. 다시 못 찍는다고 생각하고 찍기 때문인지 카메라를 들면서는 눈빛이 달라진다고 하더군요. 사진가로서 이루고 싶은 작업 중 하나가 바로 ‘신라의 완성’입니다. 그것은 바로 북한 유물 작업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하는데 마운령, 황초령, 변경까지를 망라하는 작업입니다. 고구려, 고려시대 개성에 남은 신라의 유물과 흔적을 기록하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북한과의 여러 촬영건으로 인맥과 접근 방법 등을 알아두었지요. 모두 이 작업을 염두에 두고 하는 작업입니다” “40㎏ 카메라 장비를 메고 남산을 오르락내리락해서 무릎이 좋지 않아요. 그렇지만 제 작업이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됐을 때 제 이름이 오르는 것이 그렇게 좋았어요” 신새벽이나 밤을 가리지 않고 촬영 최적시간을 놓치지 않으려 그는 오늘도 산을 오른다. ‘어깨에 소금 덩어리, 등에는 흙먼지 그래도 행복하다’ 고 하는 그의 사진들에서는 고단에 찌든 단내가 난다. “2018년 우즈베키스탄 촬영에서 돌아오자마자 옷 갈아입고 캄보디아 촬영 갔더니 몸이 아파 오더군요. 무려 75도 차이였으니 몸이 아플 수밖에요” 카메라 한대를 들면 2.7㎏정도인데 늘 한 손에 끼워서 움직이고 다른 한 손은 유물을 만지곤 한다는 그는 그뿐만 아니라 이제 30~40㎏ 카메라 장비에 체력의 한계를 절감한다고 고백한다. 무거운 카메라를 목에 걸고 수도 없이 셔트를 눌렀을 그의 노고는 고스란히 작품에 담겨 유전(遺傳)한다. -에필로그...취재를 마치고 오세윤, 그는 전업 사진작가다. 몸의 일부처럼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그는 문화재전문사진가 10대 작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에게 전화라도 걸라치면 ‘네, 오세윤입니다’라며 평소의 짓궂은 장난기를 쏙 뺀다. 정색하며 프로페셔널한 그와 사람 좋은 웃음을 자주 짓는 그의 경계는 늘 아슬아슬하다. 카메라 든 그의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카리스마는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다. 걸쭉한 김천 사투리를 밑바탕에 깐 그의 경주말은 독특한 억양과 특별한 액센트를 가졌는데, 그의 사진 속 이야기를 인터뷰하려면 ‘삼고초려’도 통하지 않는다. ‘사진가는 카메라 뒤에 있어야 한다’며 매스컴에 오르내리기를 꺼려하는 그의 변함없는 철칙은 그렇게 좋아하는 막걸리 서 너 주전자 앞에서도 허물어지지 않았다. 예민하고 여린 감수성의 소유자이면서도 마초 기질이 다분한, 작업에 있어서만큼은 다분히 저돌적인 사진가 오세윤. 그런 그가 바야흐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듯하다. 전국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으니...,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그가 참여한 이번 전시는 오 작가의 진가를 박물관이 높이 인정하고 기획했기에 지역민으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다. 그 와중에도 ‘나에 대한 부분은 보도자료에서 빼달라’고 했다니 참 어지간한 배짱이 아닐 수 없다. 여하간 이번 전시 덕에 언감생심 그와의 취재가 이뤄졌다. 삶의 이력이 저마다인 많은 취재원들 중 기자의 큰 조력자 중 한 사람인 오 선생을 만난 것은 큰 축복이다. 그가 작품을 통해 어떤 노력과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했는지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얼마남지 않은 전시를 통해 가늠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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