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삼일절(3·1 만세 운동)이 다가오고 있다. 올해는 103주년. 애국선열지사들의 고된 삶이 더욱 생각나는 요즈음이다.
경주 독립유공선열의 명예를 선양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자 우리 후대의 막대한 책무다. 국가보훈처에 본적이 경주와 월성으로 서훈된 독립유공자는 2020~2021년 새로운 서훈자가 세 명 추가되면서 모두 56인이 되었다.
경주남부보훈지청 관계자는 “국가보훈처에서 경주지역 독립유공자를 경주시와 월성군으로 나눠 기록한 것은 1955년 경주읍이 경주시로 승격되고 외곽 읍면 지역이 월성군이 되면서 당시 유공자의 호적상 본적에 따라 경주와 월성으로 나눠진 상태 그대로 표기 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국가보훈처 분류에는 ‘월성’과 ‘경주’로 아직도 나누어져 있고 56명 중 아직도 10명은 월성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 56인은 다음과 같다.
김만득, 김봉규, 김종철, 서달수, 손진형, 이순구, 장경탁, 정내영, 정수기, 황병기, 김기도, 김두오, 김민환, 김봉식, 김성권, 김성길, 김세종, 김은충, 김일성, 김재호, 김종호, 김철, 김필권, 김학봉, 김화섭, 노말수, 박문홍, 손경익, 손동창, 손문익, 손석봉, 손시헌, 손진창, 신동하, 양태원, 이대백, 이두만, 이무범, 이석채, 이인석, 이중근, 이치용, 이판득, 이홍석, 정을기, 조경규, 조근만, 채순봉, 최명표, 최상제, 최성렬, 최수창, 최완, 최준, 최해수, 허장환.
한편, 서훈 된 이들 중에서 실제로 경주 사람인데 다른 지역명으로 기재되었거나 혹은 본적이 어딘지 모르는 ‘미상’으로 기록돼 있는 14명의 경주독립유공자를 찾아내 현재까지 56명에서 모두 70명이라고 밝힌 이가 있다.
바로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혁 연구위원이 그 주인공. 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에서는 경주의 독립유공자 발굴과 선양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과 일련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재판기록이나 여러 자료들에서 그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 독립유공자로 반드시 서훈되어야 할 여덟 명의 경주 유공자도 발굴해냈다.
최혁 위원의 자문과 인터뷰를 통해 잃어버린 경주의 독립유공자 14명과 서훈되어야 할 8명의 선열들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정리해 보았다.
지면을 빌어 고향 경주로 돌아오지 못한 독립유공자들의 이름만이라도 호명해보았다.
-향후 서훈되어야 할 경주 독립유공자는 손병규 선생을 필두로 현재까지 여덟 명으로 밝혀져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혁 연구위원은 경주에서 처음으로 독립유공자를 제대로 정리하고 파악한 이다.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에서는 2018년 최부잣집에서 발견된 수 만 건 문서들 중 독립운동에 관한 내용이 다량 나오면서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53인의 경주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록을 정리해 한 권의 책자로 발행했다.
이 책자 발행 후 미서훈자 자손들도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를 많이 방문해 자연스레 독립유공자 서훈과 관련해 더욱 자세하게 살펴보게 되었다고 한다. 최 위원은 이후로도 지속적인 관심을 지니고 찾다보니, 경주사람인데 다른 지역으로 잘못 등재돼 있는 약 14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앞으로 서훈되어야 할 8명의 선열도 발굴했다는 것.
최 위원은 “앞으로 서훈되어야 할 분으로 현재 여덟 분이 계신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발굴될 것이고요. 파리장서 경주 대표로 서명한 손병규 선생, 대한광복회 본부 사무를 맡았던 이복우 선생, 3.1운동에 참여했던 윤기효, 박무훈, 서봉룡 선생,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재판기록이 나오는데도 서훈 대상자가 되지 못한 박봉록 선생, 최부잣집 최준 선생의 4형제 중 막내로 백산무역회사 상무로 상해임정에 독립자금 업무를 담당했던 최순 선생, 일본군 학병으로 중국전선으로 징병돼 갔다가 탈출해 광복군에 참여한 홍동희 선생 등 8명입니다. 100% 서훈 대상인데 누락돼 있는 것이지요”라면 서훈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문했다.
특히 손병규 선생(경북 경주군 내남면 율동리)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일명 ‘파리장서’)에 서명 한 이로 큰 공적을 세운 이다.
“전국 유림대표 137명 중 경주 유림으로는 손진창 선생과 손병규 선생 두 분이 서명하셨습니다. 손진창 선생은 2014년 건국포장으로 서훈돼 있으나 손병규 선생은 아직도 미서훈인 상태입니다. 그분의 손자는 지금도 서훈 받기 위해 노력중입니다”
최 위원이 손병규 선생이 미서훈이 되고 있는 연유에 대해 다각도로 알아본 결과, 1919년 파리장서에 서명한 뒤 1920년대 민선 도의원을 한 번했던 이력이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알게 됐다고 한다. 당시 관선 의원 이력은 당연히 친일로 여겨졌지만 민선 도의원을 했다는 이유는 친일로 단정 짓기 어렵고 친일 행각이 전혀 없음에도 민선 도의원 자체 행적을 친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선 독립운동, 후 친일’이라는 다소 명확하지 않은 기준으로 서훈이 어렵다고 했다는 것.
“손자분의 자료에 의하면 친일 행각이 없다는 것이 확실하고 마땅하게 서훈되어야 할 분이 빠져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최근(2020~2021) 새로운 서훈자로 등재된 경주독립유공자는 세 명 최근(2020~2021) 경주독립유공자로 새롭게 추서된 이들이 세 명 있다. 새 서훈자로는 김필권(2020), 손경익(2020), 노말수(2021) 선생이다.
먼저, 김필권(1883년~1973년 12월 17일)선생의 운동계열은 미주방면으로 본적은 경상북도 경주 부내 노동리다. 1907년 미국에서 대동보국회 발기인, 1913년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총무로 활동하고 1917~1919년 대한인국민회 맨티카 지방회 부회장(1917), 동회 회장(1918), 동회 실업부원(1919) 등을 역임했다. 1927년 스톡턴 지방회 구제, 1932년 동회 회장, 1943년 미국 독립신문사 이사부 부원, 1945년 북미 조선민족혁명단 집행위원 등도 역임했다. 그리고 1913~1945년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선생은 2020년 건국포장에 추서된다. 김필권 선생은 특히, 이미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한 김성권 선생의 동생이다. 형제는 경주에서 배를 타고 미국 하와이로 갔던 이로서 미국에서의 초창기 독립운동을 펼쳐 한인사회운동에도 매우 중추적 역할을 한 이들이다. 이들 형제가 경주 출생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노말수(1886년 12월 5일~사망연대 미상) 선생의 운동계열은 3.1운동으로 본적은 경상북도 경주 부내 황남이다. 1919년 3월 21일 경북 안동군 임하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해 독립만세를 외치고 신덕경찰관주재소와 임하면사무소를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았다. 선생은 2021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손경익(1924년 10월 5일~1950년 7월 5일)선생의 운동계열은 학생운동으로 본적은 경상북도 경주 내남 용장 1102다. 1941년 12월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4학년 재학 중 ‘문예부’를 표방한 항일 비밀결사에 참여해 활동하다 퇴학 처분을 받았다. 선생은 2020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됐다.
-기존 서훈된 유공자 중 명확하게 경주 사람인데 다른 지역사람으로 기록되어 있거나 혹은 지역 미상으로 등재돼 있는 14명은 바로잡아야
실제 경주 사람인데 잘못 기록돼 있는 것으로 지금까지 밝혀진 이들은 대략 14명 정도다. 최 위원이 여러 자료를 검토하다가 밝혀낸 이들 중 박중화 선생, 이만집 선생, 정만춘 선생, 정종명 선생, 손영각 선생과 이한구 선생, 손후익 선생과 손학익 선생은 주목할 만한 유공자다. 먼저 박중화 선생은 1990년 애족장에 추서되었지만 본적이 ‘미상’으로 기재돼 있다. 계몽운동에서 매우 비중있는 이로 ‘독립운동사’에 경주사람임이 명확하게 기재돼있는데도 미상이라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자료를 제시해 경주사람임을 밝혀야 한다. 2016년 애족장에 추서된 정만춘 선생은 본적이 ‘경상북도 기타’로 분류돼 있다. 선생은 경상북도 경주부 양북면 안동리(기림사 입구쪽 마을)로 밝혀졌다. 이만집 선생은 1999년 애국장에 추서된 이로 본적이 ‘경상북도 대구’로 기재돼 있다. 선생은 대구 남성동 교회 목사로 3.1운동을 일으켰다. 원래는 경주 강동면 호명리 사람인데 대구서 활동했다고 대구로 등재돼 있다는 것.
정종명 선생은 2018년 애국장에 추서된 이로 본적이 서울로 분류돼 있다. 정종명 선생은 국내 항일운동에 앞장서고 일제강점기 여성운동의 선구자였다. 근우회의 리더로서 존경받는 사횔활동가이자 신여성이기도 했다. 애국계몽운동을 주제로 강연을 했는데 가장 인기강사였다. ‘매일노동뉴스, 2021, 2월 15일’자 기사에서 정종명 선생이 경주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는 근거를 확인 할 수 있다. ‘정종명은 1896년 출생으로 여러 설이 있으나 태어난 곳은 ‘동아일보 1925년 10월 20일’자 기사에 따르면, 경상북도 경주로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사했다고 한다. 또 1931년 잡지 ‘삼천리’ 기고문에 따르면 정종명은 경상도 출신이기 때문에 동향의 사회운동가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사회주의 사상가가 됐다고 한다’라고 썼다.
최 위원은 “이 외에도 의병부대를 실제 이끈 이들 중 산남의진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한 손영각 선생과 이한구 선생도 실은 경주분들이셨습니다. 국가보훈처 유공자 기록에는 두 분 모두 ‘경상북도 영일’로 서훈돼 있습니다”라고 했다.
또 손후익 선생과 손학익 선생을 꼽았다. 손후익의 조부는 손최수 선생인데 을미의병이었다. 손후익의 삼촌은 손진형이다. 손후익 처남이 정수기로 역시 수훈돼 등재돼 있다. 손후익의 따님은 심산 김창숙 선생의 며느리기도 하다. 그야말로 경주 최고의 독립운동 집안으로 경주서 이 가계는 몇 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한 집안이다. 이 집안은 1926년까지 경주 오금리에 살았으나 일본 경찰의 압제와 감시에 못 이겨 살기 힘들어 울주군 입암리로 이사 갔다. 동생인 손학익 선생은 말년에 다시 경주로 회향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손후익 선생은 ‘울산’, 손학익 선생은 ‘경상남도 기타’로 등재돼 있는 것.
“경주향교에서 발행한 ‘향현록(2017)’에도 분명히 경주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