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포읍내에 들어서면 중요 요지에 유독 ‘다방’ 간판이 자주 눈에 띈다. 아직까지 다방이 흔하게 있어 다방 ‘아가씨’들이 커피 배달을 하는 일상이 흔한 감포읍.
유난히 향토색 짙은 감포항구라 그런지 유독 다방이 많은 듯하다. 지금의 MZ세대는 다방이 어떤 곳인지 생경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항구 근처엔 항구와 바다를 차경(借景)한 전망 좋은 깔끔한 카페보다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건축물에 뱃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다방이 훨씬 많은 곳이 바로 감포다. 그래서 삶의 다양한 이면이 이곳 다방들에 득실거린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드라마 세트장 같은 감포읍 거리는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시가지로, 1970~80년대 소도시에서나 봄직한 풍경으로 아릿하게 다가온다.
오늘날까지 감포읍내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2층 목조 건축물들이 듬성듬성 남아 있으며 지금도 가게나 살림집 등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항구다방’도 그들 중 하나다.
다방들은 낮고 허름한 간판들을 달고 감포읍민의 생의 터전으로, 읍민의 민낯으로 여전히 건재하고 있었다.
감포 항구 하얀 등대와 정박한 선박들 사이로 해가 떠오르는 시간엔 이미 항구다방의 문은 활짝 열려있다. 감포항구가 지척이어서 ‘항구다방’ 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려보인다.
그런 감포에도 최근 기존의 다방에 새로 문을 연 카페가 들어서고 있어 그 지형도가 달라지고 있다. 그러나, 감포항구 바로 맞은편에 위치해 아직 감포 뱃사람들을 ‘꽉 쥐고 있는’ 항구다방 김외숙(65) 사장을 공들여 만났다.
자그맣고 여배우 같은 인상의 소유자인 그녀는 기자와 함께 쌍화차 한 잔을 나누며 20년간 감포에서 운영한 항구다방의 이력을 조근조근 들려주었다. 그녀는 천상 다방 마담이었다.
-“제 자신을 낮추기를 반복했어요” 감포에서 20년간 살았다고 하는데도 진한 경남 억양 그대로였다. 그녀 특유의 억양은 이곳 감포 토박이가 아님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마산이 고향이다.
“바닷가니까, 뱃사람들 덕분에 다방이 그래도 활발하게 영업중인 거죠”라며 첫 일성을 떼는 김외숙 사장은 애초에는 감포에서 다방을 운영하려고 온건 아니었다. 옷 장사를 하던 김 사장은 보증을 잘못 써 부도로 마산을 떠났고 포항서 다시 옷가게를 운영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막막했었다고 한다.
“두 아들 공부 뒷바라지도 해야 했어요. 우연하게 소개를 받아 이 업을 하게 됐습니다. 20년 전이니 제 나이 마흔 다섯이었죠. 그때는 젊었으니 예쁘다했죠(웃음). 이 일을 하면서 아이들 공부시키고 잘 키웠어요”
감포읍민으로, 다방 주인으로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기까지는 텃새도 많았고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한다.
“장사가 너무 잘되니까 방해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살기는 살아야하고 애들 공부도 시켜야 하니 장사를 안 할 수 없었지요. 제 자신을 낮추기를 반복했어요. 그까짓 자존심이 뭐라고요. 읍민들과 조화를 이루고 손님들에게 맞추려고 노력했는데 사실 힘들었어요. 지금은 오히려 많이들 도와주십니다”
인터뷰 중에도 여러 손님들이 들어오고 나갔다. 그녀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손님들을 맞이하고 차를 내놓았다. 그녀의 전화로 걸려온 차 주문 전화도 직접 받는다. 녹차 주문과 함께 라면 한 개도 주문한다. 차를 가져다주는 길에 서비스 차원에서 잔심부름도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제는 손님들 수준에 맞춰서 시원스레 농담도 할 만큼 이곳 감포읍민과는 각별해졌다고 한다.
-다방 입구 한쪽엔 시커먼 연탄 수북, 세련된 카페에선 상상도 못할 장면 원래 사용하던 ‘항구다방’ 이름을 그대로 전수한 이곳은 적산가옥으로서 다방으로 운영하기 전엔 여인숙이었던 가옥이었다. 개업할 당시 20년 전에 만든 메뉴판도 그대로 있었다. 지금은 몇 가지 메뉴가 사라졌단다. 기다랗고 널찍한 마흔 다섯 평 규모의 다방 내부에는 읍민들의 체취가 진득해 보이는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져있고 다방 입구 한쪽엔 시커먼 연탄을 수북이 쌓아 두었다. 세련된 카페에선 상상도 하지 못할 장면이었다. 그렇다. 여기는 감포니까. 비교적 널찍한 공간이다 보니 연탄난로 두 대가 연결돼 있었다. 일 년에 1000장 정도 연탄을 쓴다고 하는데 지난 10월에 300장을 먼저 넣어 미리 월동 준비를 했다고 한다. 한 해에 300장씩 서 너 번은 연탄을 들여놓아야 겨울을 난다고 했다.
-“전화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바로 압니다. 손님들 차 마시는 취향 환하게 꿰고 있어” 2001년 경 개업했을 당시는 지금보다 다방이 많았고 장사도 잘되었다. 당시는 22개소 정도였고 지금은 15개소 정도라고 한다.
“옛날만큼은 장사가 잘 되지 않아요. 외국선원들을 많이 고용하고 한국선원들이 줄어든 탓인데 외국선원들은 다방 출입을 하지 않아서입니다. 뱃사람 10명이면 5명이 외국선원인데 다방 숫자가 줄어들 수밖에요”
결국 감포 어민수가 줄어들고 외국인 선원을 고용하는 현상이 다방이 줄어든 연유였다.
“2000년 초반만 하더라도 양남의 원자력이 가동될 때여서 그 손님들과 뱃사람들이 함께 손님으로 오니 얼마나 활황이었겠어요. 그때는 하루 종일 북적거렸어요. ‘아가씨’들도 열 명이 넘었습니다. 우리가 제일 많았죠. 생마 등 생과일 쥬스가 많이 나갔죠. 쌍화차도요. 술을 마시고 오신 분들이 많아선지 생마즙이나 생칡즙 같은 메뉴가 잘나갔어요. 계피와 대추를 밤새도록 하루 종일 푹 고아서 따뜻하게 내거나 차게 드렸죠. 지금은 사라진 메뉴지만요. 걸쭉한 맛이 일품이었죠”
커피 한 잔 2500원, 냉커피 5000원, 쌍화차 6000원, 칡차는 2500원이다. 그런데 낯선 메뉴명이 보였다. ‘칡목’이라는 메뉴인데 칡즙에 우유를 넣는 것으로 옛날 ‘목장 우유’를 사용해서 ‘칡목’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김 사장은 손님의 차 마시는 취향 즉, 설탕이 몇 스푼인지, 프림의 유무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전화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바로 압니다. 제가 그런 부분은 타고 났나 봐요. 한번만 들어도 저는 알겠더라구요. 손님이 오시면 묻지 않고 바로 기호에 맞춰 커피를 내지요”
-“날이 새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있어요. 매일 비슷한 날 같아도 늘 다른 일들이 생기죠” 항구 다방은 새벽 다섯시 반이면 어김없이 환하게 불을 밝혀 감포의 새벽을 깨운다.
“새벽에 일어나신 어르신들이 어판장을 한 바퀴 돌고나면 집엘 안가시고 다섯시 반부터 들어오십니다. 아홉시경 마치니 하루 종일 일하죠”
김 사장은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다섯시까지 출근하니 새벽부터 분주하다. 제일 먼저 연탄불 점검하고 더운물 올려서 커피부터 내린다. 커피 내리는 시간에 곱게 단장을 마친다.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단골손님들이 하나둘씩 다방을 꽉 채우기 시작한다.
“단골손님이 오시는데 맨날 보는 그 얼굴들이예요. 그간 작고하신 분도 있지만 꾸준하게들 오셔요. 바닷사람들이라 다소 거칠기는 해도 반면에 순박한 인심이 넘쳐요. 의리도 있고요. 뱃사람들이라 ‘뱃자리’를 옮기거나 할 때 우리 다방에서 다른 뱃자리를 소개하고 선주에게 연락해 일할 사람을 알선하기도 하니 미팅 장소인 셈이죠”
“우리 다방에서 일하던 아가씨들도 뱃사람과 만나 시집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자식 같은 애들이 ‘엄마엄마’ 하면서 다니러 와요”
현재는 30대부터 50대까지 다섯 명의 직원이 일한다. 항구다방엔 단골손님이 많다.
“거의 60대서부터 7,80대 손님들이 대부분입니다. 손님들과 어울리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날이 새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있고요(웃음). 매일 비슷한 날 인 듯해도 늘 다른 일들이 생기는 거죠” “또 부산의 오징어 배 선장들과 제주도 복어잡이 배들이 감포항에 들어올 때 그분들도 오시는데 참 재밌어요. 기다려지죠”
“마음을 열어놓고 대하지 않으면 안돼요. 시내 다방들과는 여러모로 다를 겁니다. 감포읍민들은 생활력이 참 강해요. 억척스럽죠. 정말 닮고 싶은 분들도 많아요. ‘김명수 젓갈’ 사장님도 아침마다 오시는데 정말 검소하고 부지런하시거든요. 임동철 전 수협조합장님은 선친의 배사업을 이어받아 감포의 옛이야기도 많이 아시고 감포사회에 기여도 많이 하신 분입니다”-20년간 지킨 가장 중요한 철칙...새벽 다섯시에 출근해 다섯시 반에는 반드시 문 여는 것 김 사장이 지키는 가장 중요한 철칙 하나는 새벽 다섯시에 출근해 다섯시 반에는 반드시 문을 여는 것이라고 한다.
“저도 몇 번인가는 너무 피곤해서 문 열기가 힘들었던 적이 있었어요. 손님들과의 약속이기에 그 약속을 어기고 산 적이 없었어요. 신뢰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개업하고 20년 동안 어깨 수술한다고 20여 일 문을 열지 못했고 아들 결혼식으로 이틀 정도 비운 것이 전부예요. 하루도 쉰 적이 없었어요”
요즘은 관광객들로 주말에 더 바빠졌다고 한다. 회 먹으러 와서 다방에도 들리고 커피도 주문한다는 것. 호기심 많은 젊은 세대들은 아날로그적 감성을 충족시키고 장년층들은 추억을 되새기는 장소로 들린다고 한다.
“수협조합장 등 선거시즌이 되면 우리 다방에서 여론형성이 다 이뤄져요. 시장, 시의원, 농협조합장때도 그렇고 수협조합장 선거 때는 말도 못했죠. 여기서 형성된 여론의 결과는 100% 다 맞아떨어졌어요. 선거철 되면 새벽부터 우리 집(김 사장은 다방을 ‘우리 집’이라 자주 표현했다)은 불납니다. 지역 어르신들이 먼저 이야기하러 오시고 거의 적중합디다. 저는 다 알지요. 이곳이 감포의 정보통인걸요. 저를 감포의 언론인이라 한대요(웃음). 가장 먼저 정확한 소식을 알기 때문이겠지요. 감포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은 다 듣지만 항상 말 조심하죠” 감포항구엔 ‘항구다방’이 있다. 그 다방에는 새벽 다섯시부터 손님을 맞이할 채비를 마친 어여쁜 마담이 있다. 작고 여리게 보이지만 20년간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감포에서 ‘항구다방’을 꾸려온 이다. 뱃사람들의 근심과 시름은 덜어주고 좋은 일은 그 기쁨을 배가시켜준 곳이 바로 항구 다방이었다.
“앞으로 5년만 더 할래요. 지금까지는 제 생활 자체가 없었거든요. 일흔부터는 못 가본 여행도 하고 싶고 친구들도 만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김외숙 사장의 말처럼 아직 새벽어둠조차 덜 물러간 자리에 환하게 켜지는 항구다방의 불빛을 얼마나 더 볼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머물렀던 그 다방에서의 온기와 삶의 활기는 감포사회에서 오래도록 회자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