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통이 트이는 공간이다. 카페 바흐는(CAFE DE BACH). 경주 하동에 있는 카페 바흐에선 여기저기 비치돼 있는 책을 읽어도 좋고 투명한 유리창 너머 흘러가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봐도 좋다. 코로나로 말이 단절된 상황에서 사람들의 발길을 연결해 주는 카페 바흐는 사람과 사람 사이 끊긴 이야기를 이어주고 ‘느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안식처로 여겨지고 있다. 방문자들과 다각적인 문화 마인드로 접근해 온 카페지기 최병한 대표는 음악 카페라는 정체성에 부합하면서도 연중 독서토론, 작은 음악회, 인문학 강좌, 영화 감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2016년 1월 개업한 이후로 지난 6년간 카페 바흐의 작은 공간에서는 수시로 음악회가 열리고 작은 공연들이 이어졌었던 것.
이 공간에서 유명 예술가들의 내밀한 스토리를 엿볼 수 있는 이색 전시가 열리고 있다. 최병한 대표의 오랜 지기인 최부식(시인, 전 경주문화원 이사, 전 포항 MBC편성제작국장)씨의 소장전 ‘예술가들의 사적인...’전이 오는 2월 26일까지 열리는 것이다. 최 시인은 미술애호가로서 전국에서도 컬렉터로 손에 꼽힐 정도다. 최 대표는 음악 카페를 운영할 만큼 음악에 조예가 깊고 최 시인은 미술 전반에 전문적 애호가니 그 하모니는 말 할 필요가 없겠다. 음악과 미술의 콜라보인 셈인데, 두 고수의 만남으로 최근 이 공간을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카페 바흐에서 2월 26일까지... 전직 PD 출신 최부식 시인의 36년 컬렉션 소장작 중, 예술가들의 편지글 한 자리에서 감상 이번 전시의 주인공인 최부식 시인은 전직 방송 PD였다. 그림에 대한 탁월한 감각과 안목으로 36년 간 컬렉션 한 이로 지역에서는 컬렉터로도 그 이름이 높다. 1984년 방송국에 입사해 문화 다큐멘터리와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미술과 컬렉션에 눈을 떴다.
‘겸재 정선, 청하의 가을을 보다’, ‘경술국치 백년, 석굴암 100년의 진실’ 등 지역 역사와 문화의 뿌리를 찾는 다큐를 제작하면서 그의 그림 수집은 가열차졌다. 그림에 미쳐 녹록치 않았던 월급쟁이 컬렉터로서의 어려움, 강요배 화가의 작품을 보고 너무 좋아 화랑에 통사정해서 할부로 사게 된 사연, 해외 인터넷 미술경매에 참여해 사게 된 작가들의 작품이야기 등 그의 컬렉션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는 끝이 없다. 그의 작품 구매 패턴과 영역은 세계 곳곳에 걸쳐 있었다. 그가 소장한 에곤 실레 등의 작품들 면면이 이를 방증한다. 또 그간 해외를 다니며 박물관이나 헌 책방, 음반가게를 뒤지며 만난 소장품들도 많다. 1989년 방송국 재직시절, 도굴꾼들을 다룬 다큐로 받은 상금으로 해외 여행길에 올랐다.
런던과 파리, 스위스를 여행하다가 런던의 음반 가게를 뒤지다 우연히 음악가 윤이상의 사인이 들어 있는 LP 음반을 보고 바로 구입한 것도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또 헌책방에서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 저자 사인본과 드뷔시의 ‘녹턴’ 악보 초판본을 손에 넣으면서 색다른 컬렉션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도 피카소의 드로잉 모음 스케치북, 드뷔시의 녹턴 초판 악보 등이 함께 전시된다. 그간의 컬렉션을 펼친 소장전으로는 2016년 포항시립중앙아트홀에서 ‘최부식 소장전-그림과 시인’ 컬렉션전을 열어 주목 받은 바 있다. 애지중지하던 그의 소장품을 공개한 것이다. 2021년 7월, 제주도 갤러리 누보에서 ‘최PD의 그림 중독-에곤 쉴레에서 강요배까지’전에서는 에곤 쉴레, 르 코르뷔지에, 마티스, 마네, 장 꼭또, 루이 이까르 등의 해외작가와 변시지, 강요배, 김구림, 남관 작품 등의 국내 작가를 포함한 총 30여 점을 전시했다. 2021년 6월에는 100년 ‘황남정미소’에서 40여 점을 특별 전시했으며 10월, 갤러리 카페 화에서도 전시 한 바 있다. 모두 지역 주민과 함께 나누기 위한 전시였다. 카페 ‘바흐’에서는 이번이 두 번째 전시.
-예술가 생가나 박물관에 가야 만날 수 있는 진귀한 전시... 르누아르나 밀레 편지글은 미술시장에서도 보기 힘들고 국내에 소개된 예도 거의 없어 최 시인은 “카페 바흐 오픈 6주년을 기념해 ‘늘 향기로운 친구인 최 대표의 친구로서 축하할 방법을 고민하던 중 전국 각지에서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공유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번 전시를 제안했습니다”라며 예술가들의 사적인 이야기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부분에서의 소장품을 모아 전시하기로 했다고 한다. 마침 유명 예술가들의 친필 편지를 모아 두었기에 선별해 전시할 수 있었던 것. 편지글들은 일일이 번역을 의뢰해 친절하게 해석해 두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밀레의 판화작품과 친필 편지글 등 네 점, 쇼스타코비치 편지글, 오펜바흐의 글씨, T.S.엘리어트 타자 편지글과 사인, 르누아르 편지글, 샤를 구노 작곡가의 편지글, 로댕의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느낄 수 있는 친필 편지글, 생상스의 편지글, 루빈스타인 지휘자의 초상 판화, 윤이상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는 LP 음반(윤이상은 경주고등학교 교가를 작곡한 이로도 유명) 등이다.
친필 편지글들의 경우, 예술가의 생가나 박물관에 가야 만날 수 있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진귀한 전시가 아닐 수 없다. 예술가들의 친필 필체를 음미해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특히, 르누아르나 밀레의 편지글은 미술시장에도 잘 나오지 않으며 국내에 소개된 예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그간 소장자가 발품 팔며 머나먼 이국땅에서 공수 해온 작품과 자료들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으니 최 시인의 공력에 감사할 뿐이다.
-아래는 이번 전시에 출품된 예술가들의 편지글들이다. -르누아르(1841~1919)‘친애하는 위세나에게.내일 밤 저녁 식사를 저와 함께 가실 수 있겠습니까? 가능하시다면 매력적인 몽마르뜨 극장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당신이 거부하지 못할 만큼 멋진 계획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당신의 친구, 르누아르’.-T.S. 엘리엇(1888~1965), 1951년 4월.‘카펜터 씨에게....당신의 시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보내주신 시는 다른 출판사에도 읽어보라고 보냈습니다. 이후, 저는 건강상의 이유로 일하는 것을 벗어나 쉬고 있습니다. 당신의 시가 매우 인상적이기는 하나, 그 시들은 매우 높은 비용과 적은 수요로 인해 우리가 시 목록을 한도 내로 제한해야 하기 때문에 저희로서는 이 시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까미유 생상스(1835~1921), 1885년 5월 24일 파리에서 쓴 편지. ‘...만약 콘서트 일정을 바꾸실 경우라면, 정해진 일정보다 좀 더 늦게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일정보다 앞당기면 제가 안 되는 것은 코믹오페라가 다가오는 계절 초입에 내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고 파리 극장들은 늘 일정이 지연되는 경향이 있어서입니다...’-로댕(1840~1917), 1913년 2월 11일 편지. ‘부인, 사과를 해야겠습니다. 지난 일요일 2시 30분부터 3시 30분까지 워크숍이 있어서 라투르 레스토랑에 있습니다. 기억력이 감퇴하고 있나 봅니다. 부인의 방문을 제가 놓쳤네요. 부디 용서하세요’ -샤를 구노(1818~1893) 1983년 11월 5일 편지. ‘사랑하는 나의 작은 친구여. 추억을 위한 멋진 징표와 당신에게 키스할 수 없었던 저의 수천가지 걱정과 후회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비그니의 건강으로 인해 고문 받는 슬픔을 느낄 것입니다. 서둘러 그리고 슬픔을 담아...’-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 1954년 11월 1일 모스크바에서 쓴 편지.‘당신에게 이런 부탁을 드려 미안한 마음입니다. 이것을 E.A.Mravinsky에게 전달 바랍니다. 큰 부탁을 드리게 되는군요. 용서하세요. 마음을 담아, 쇼스타코비치’ 이런 서간문 이외에도 샤걀의 친필 사인이 들어있는 판화, 1965년 샤갈의 자화상을 커버 사진으로 해 친필 사인이 표기 돼있는 ‘타임’지, 고갱이 타히티 섬에서 그림 그리고(주로 스케치) 편지 쓴 것을 책으로 묶은 서화집(1951년, 프랑스), 보자마자 바로 구입한 피카소 화첩(1948년 프랑스), 드뷔시 ‘녹턴’ 1900년 초반 초판 악보, 샤갈 화집, 로댕 화집, 밀레 화집 외에도 폴 새그뉴, 프랭클린 화이트의 회화 등도 전시하고 있다.
-“경주에서 저희에게 주어진 분량만큼 문화적 기쁨을 나누는 것으로 행복합니다” 전시를 제안한 최부식 시인은 “최 대표는 문화의 본 무대 뒤켠에서 여러 루트를 통해 문화예술의 지평을 넓히고 문화 운동을 부흥시키고 있는 친구입니다. 지켜보고 응원하다가 다르게 나아가고자 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이야기 거리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미흡하지만 제 소장작들 중에서도 ‘예술가의 사적인,,,’ 전을 준비했습니다”라고 마음을 전했다.
최병한 대표는 “지난 2년간은 코로나로 정례적으로 해오던 행사를 하지 못해서 갈증을 느끼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기쁨을 주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음악 들으면서 작품도 감상하니 미술과 음악이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손님들이 너무 좋아하십니다. 그야말로 찰떡궁합이죠. 친구가 좋은 작품을 많이 소장해서 가능한 일이지요. 경주에서 저희에게 주어진 분량만큼 문화적 기쁨을 나누는 것으로 행복합니다”라고 했다.
두 사람은 각각 음악과 미술 분야에서 전문가적 수준의 경지에 있는 이들이라 믿고 감상할 수 있는데다, 카페 공간이니 누구나 쉽게 들러서 감상할 수 있어 일석이조다. 예술가들의 사적(私的) 은밀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번 전시를 놓치지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