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을 막 지난 ‘수봉정秀峯亭’은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막 피어난 청매화의 향기며 안채 툇마루에 내린 나른한 햇살이 그랬다.
“衣·食·住 족한 이상의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며 가진 자의 베풂을 실천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철학을 몸소 행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수봉정은 신라 제 38대 원성왕릉의 괘릉이 있으며 신라의 절터 감산사가 있는 유서깊은 외동읍 괘릉리에 위치하고 있다. 100여 년 고택 수봉정은 이규인(수봉)선생의 고귀한 정신의 결정체로서 선생의 단아한 기품을 집안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을 선사했다. 일제강점기에 ‘실용적 선각’과 ‘사회의 정의 및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일깨워준 이규인 선생의 진한 삶의 이야기를 간직한 수봉정은 현재 선생의 후손 이태형 수봉교육재단 이사장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수봉 선생의 생애
선생의 이름은 규인圭寅, 자는 우서瑀瑞이며 수봉秀峯은 선생의 아호다. 외동읍 괘릉리에서 출생(1859년~1936년)한 선생은 ‘내 힘이 미치는 데까지 부를 이루고 이로써 이웃과 겨레를 위해 힘이 되리라’ 며 먼저 부를 축적한 후 이를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우리 겨레에 실질적인 혜택을 입히고 일제압제에 신음하는 겨레를 일깨우고자 하는 실용적 선각자였다. 선생은 당대에 만석의 부를 성취한다.
선생이 회갑을 맞은 1919년 교학과 의휼의 신조는 선생의 숭고한 정신세계이다. 선생은 일생을 통해 근검과 절약을 몸소 실천했고, 수봉정을 세워 많은 학동을 모아 가르쳤다. 어렵고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고 의료 사업을 펼치며 민생의 고난을 같이한다.
특히 선생은 독립 의사들의 편의를 적극적으로 제공하고 독립자금 조달에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독립운동단체에 군자금을 지원하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을 보호하였으며, 어려움에 처한 해외동포를 구호하는 사업에 정성을 다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몫과 사회의 정의 및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일깨워준 것이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 확산될 당시 회갑을 맞이한 선생은 수봉정 안에 학당을 개설하고 훈장을 초빙하여 향리와 인근 청소년을 교육했다.
선생은 교육구국의 창학이념 아래 이수봉정李秀峯亭 명의의 자산을 포함한 거액의 사재를 들여 ‘사립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려 한다. 그러나 일제의 간교한 방해 공작으로 거듭 지연되던 중 1936년 78세의 일기로 열락당悅樂堂에서 생을 마감한다.
오늘의 경주 중·고등학교는 바로 선생의 구국 교육과 학교 설립의 뜻을 후손들이 받들어 실현한 결과이다.
수봉정秀峯亭, 수봉 선생의 선각과 실천궁행을 배우는 도장
수봉정秀峯亭은 근대기의 목조건축물로서 1924년 수봉 이규인李圭寅 선생이 자택의 한 쪽에 건립한 건물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홑처마인 팔작지붕의 단층 건물로서 1995년 1월 경상북도 기념물 제102호로 지정되었다.
지역의 구휼사업 및 육영사업을 추진하면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지원을 펼치던 곳이었다. 일제 침략기에 핍박받는 경주 지역 조선민중에게 배움의 터전과 의료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 건립된 건물로 학교이자 의원이었다. 1924년에 2층으로 창건되었다가 1953년에 지반이 약해지자 집을 뜯고 단층으로 개조했다. 당시의 2층이었던 수봉정의 모습은 현재 천정이 ‘우물반자’로 덮여 있고 그 속에 다락층이 남아 있다는 점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층의 모습은 사진으로 전해진다.
당시는 일제의 수탈로 인해 유리걸식하는 과객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이에 선생은 힘닿는 대로 이들을 수봉정과 본가에 수용해 숙식을 제공하고 각종 편의를 도모한다. 수봉가에 유숙하는 과객의 수는 매일 3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내부의 쓰임새를 보면 둘레에 툇마루를 두르고 중앙에 3칸 대청을 두되 대청 왼쪽에는 글방인 비해당匪懈堂을, 대청 오른쪽에는 약방인 보인재輔仁齋를 각각 2칸 규모의 온돌방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학교와 의원을 겸하도록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건립 이념은 근대 민족교육의 터전과 민중 의료의 장을 개설하는 것이었음에 반해 건물 형식은 서원이나 서당 건축의 전통적인 강학당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
수봉선생의 위패를 홍덕묘弘德廟에 모시고 봉향해
수봉 선생의 일족인 이승찬씨는 “수봉정은 현재 3000여평의 대지에 두 가구(큰집, 작은집)와 곳간, 열락당, 괘정서사, 괘동서사(수봉정), 사당인 홍덕묘 등이 한울타리 안에 공존한다. 1924년 당시는 지금의 수봉정의 모습보다 여러채가 더 있었다” “당시 3형제가 한 울타리 안에서 생활했다”고 전하며 지금은 두 가구의 형태가 남아있다고 했다.
유림에서는 1998년 수봉 선생을 한 해에 한 번씩 향례하기로 결정하고 선생의 위패를 불천위로 받들어 괘동서사 홍덕묘에 모시고 봉향하고 있다.
이로써 수봉학원은 물론 경주 지역의 새로운 향례 문화가 조성되기에 이른다.
이 향례에는 인근 괘릉초등학교학생, 경주중고등학교 학생들도 함께해 수봉선생의 뜻을 기린다고. 괘정서사와 열락당은 사랑채의 역할을 한다. 이는 외부의 사람들에게 오픈 되어 있는 공간으로 남자의 공간이 밖으로 나와 있는 것.
4칸의 곳간채, 당시 7000석 정도 부 축적 규모를 짐작
큰 대문의 오른쪽칸에는 근대식 시설을 엿볼 수 있는 화장실이 딸려 있는데 이것도 이 집만이 가진 근대기 건축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열락당과 연결된 대문을 통과하면 큰 집의 안채가 보인다. 한편, 괘정서사와 열락당 사이에는 작은 집의 안채가 있다. 대문을 열고 정원길을 따라가면 맞은편에서 곳간채를 만난다.
이우찬 경주시 문화재과 직원은 “두 가구 중 큰집 안채 7칸(퇴칸 포함)의 지붕은 다소 특이한 형식을 띠고 있는데 맞배지붕의 오른쪽 물림칸은 날개 지붕을 달아서 팔작지붕의 형태로 연결한 것에 반해 왼쪽 물림칸 지붕은 원래의 지붕의 형식과 같은 맞배지붕이다. 이 서로 다른 양쪽 지붕을 가진 물림칸은 후대에 달아 낸 곳으로 보인다”며 “다른 하나의 특징으로 누마루가 있는 아래 5칸의 아랫채는 사랑채 역할을 했다”고 추측했다.
또 “두 가구의 지붕 용마루 위에는 두 마리 오리로 보이는 장식물이 보인다. 이는 다산의 상징이거나 부귀영화 혹은 집안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민가의 장식물”이라고 설명했다.
두 가구는 모두 안채, 좌우 아래채와 사랑채가 있는 전형적인 남부지방의 트인 ‘ㅁ’자 집이다. 이로써 20세기 초의 건물임을 알 수 있는 것.
이우찬씨는 “이 인근의 근대건축물중 4칸의 곳간채의 의미는 최부잣집과 더불어 당시 7000척 정도의 부를 축적했던 집안으로서 이 집의 부를 짐작 할 수 있는 최고의 규모로 보인다. 3량가의 완전한 모습의 한옥형태 곳간이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다. 곳간채 뒤에 다른 하나의 곳간채가 더 있다”고 이 집 곳간의 가치를 힘주어 말한다.
수봉정을 다녀가면 승진한다?
한말 의병장으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신돌석 장군과도 교분이 두터워 자주 수봉정을 방문했는데 지금도 열락당 정원에는 신장군이 들어올렸다는 ‘장군석’으로 불리는 큰돌이 있다. 이 일화로 미루어 보면 괘릉리 수봉선생택은 신장군 의병활동의 군자금보급처이자 은신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청포도’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육사도 선생의 도움을 받은 이 중 하나다.
육사가 의열단 활동을 하고 있을 때도 자금지원을 했으며 그가 경주에 머물면서 ‘청포도’를 비롯한 시작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도 수봉가의 후원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수봉정에 얽힌 이야기로는 이회창 전 대통령 후보가 낙마후 마음을 정리하러 다녀갔다는 일화가 있으며 졸업생이나 진급을 앞둔 공직자들이 하룻밤 묵고 가면 승진을 한다는 에피소드도 전한다.
수봉정을 줄 곧 지켜 온 종부 박분규(90) 여사는 남다른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자손들이 오면 수봉정이 가득찬답니다. 예전에 손님들이 많이 왔고 지금도 많이 오시지요. 봄이 오면 정원이 굉장하지요.” 과연 잘 꾸며진 화단과 정원에는 각종 정원수와 꽃들이 어우러져 있어 이 고택의 정결함을 배가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