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온화함이 불천위 사당 모신 종택으로 장구하게 흘러 넘쳐
“옛날부터 문구멍이 성한 데가 없어야 집이 된답니다” “김 호 장군 할아버지가 항상 우리 후손들을 지켜 주신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텅 비어있는 고택이 아니라 아직도 장작에 불을 지피고 메주를 손수 만들어 장을 담그는 김호 장군 14대 종부(이영숙, 56)가 살고 있는 고택이 있다.
경주시 탑동의 너른 들녘을 지나 좁은 마을길을 따라 가다보면 임진왜란 당시 노곡蘆谷에서 의병장으로 공을 세운 김호(1534~1592)장군의 고택이 나온다.
신라 유적이 즐비한 이 길에서 만나는 유일한 조선시대 유적지다. 지척지간에는 이 고택의 정자로서 김호 장군의 호를 따서 지은 ‘월암재’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찾고 온기가 넘쳐야 집 수명이 길어진다는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이씨는 14대손이었던 남편의 기일을 하루 앞두고 있어 장을 봐 왔다고 했다. 그녀는 두 아들의 학업 뒷바라지를 위해 생업을 겸하며 이 고택을 관리해왔다고 한다.
-14대 종부...그녀는 꽃처럼 붉고 애련하다
14대 종부 이영숙씨(56)는 수줍음이 많고 단아한 전형적인 한국의 여인네다. 절개와 기상 또한 그녀의 가녀린 풍모 곳곳에 스며있다. 김호 장군 14대 종부로서 한 점의 오점도 남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온 그녀 덕에 이 고택의 다양한 앵글 속 세간들과 사소한 공간에서조차 반들거리는 윤기와 따스한 온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것은 부지런한 그녀와 그간 다녀간 이들이 유기적으로 만들어낸 온기였다. 물론 김호 장군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은 그녀 최고의 수호자였다.
“내 개인은 없어요. 가문에 누가 될까봐 내가 책임 질 수 있고 끝까지 할 수 있는 일만 해왔죠. 올해 체험 프로그램을 하면서 종가체험이나 다도체험 프로그램의 경우도 막연하게 운영하는것 보다는 기왕이면 명품고택체험과 더불어 하룻밤 묵으면서 제사체험이나 종가체험을 직접 겪어보면 더 보람있겠다는 생각에 경주시 프로그램과의 연계를 생각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명품고택사업’을 시행해보자는 시의 제의에 동의했다고. 고택, 종택명품화 지원사업은 전통한옥체험을 통해 종가의 전통이 살아있는 종택을 명품화해 전통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 및 고택의 품격을 제고시키는 목적의 사업이다.
고택의 역사가 최소 150년 이상 또는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으로 종손이나 종부,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는 종가로서 고택고유의 음식 등 생활문화의 체험이 가능한 고택이어야 하는데 김호 장군 고택은 이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
“생업을 하면서도 제사 한 번 소홀히 한 적이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밤이나 새벽까지 제수를 손수 준비했어요” “평생을 이 집안의 종부로서 내 머릿 속에는 애들 잘 키우고 조상님 제사 모시는 일밖에 없었어요” 라는 이씨는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뒤를 이어 이 고택을 관리하며 두 형제를 훌륭하게 장성시켰다.
-김호 장군(1534~1592)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경주 부근의 각 군현을 돌아다니면서 민심의 안정을 꾀하고 적진을 공략하였다. 1592년 8월 경주노곡싸움에서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는 싸움을 벌이고 전사했다.
본관은 경주로 자는 덕원, 호는 월암月庵이다. 1570년(선조 3년) 무과에 급제하고 20년의 관직생활 끝에 하향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도대장에 임명된다. 경주 부근의 각 군현을 돌아다니면서 민심의 안정을 꾀하고 의병을 모아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수시로 적진을 공략하여 적지 않은 전과를 올렸다. 전곡과 전천 등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부산첨사에 제수되었다.
또 의병 1400여 명을 이끌고 경주 노곡에서 적군과 맞부딪쳐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적군의 북상을 저지하다가 언양에서 진격해 온 약 500기에 달하는 적군과 싸워 적을 섬멸하였다. 그러나 그도 경주노곡싸움에서 큰 부상을 입고 전사한다. 이 싸움에서 의병은 경주 일원의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고, 끝까지 추격을 감행했다. 그 전과가 커 1758년(영조 34) 다시 형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월암 김호 장군 사후 곽재우 장군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두 아들도 전사하게 된다. 이에 막내아들이 가문을 유지하게 된다. 한편, 김호 장군과 친분이 있었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동시대의 잠와 최진립(1568∼1636) 장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아서 김호 장군의 업적과 생애가 더 정확하고 널리 알려지기를 원하는 바람을 후손들은 가지고 있다.
-약 400년의 모습 유지하고 있는 중요 민속자료 34호…김호 장군고택
17세기전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며 본채의 경우 약 400년의 모습 그대로 유지되어 있는 편이다. 1977년 중요 민속자료 34호
로 지정된 이 고택의 집터는 신라시대 절터였다는 설이 있으며 주변에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석조물이 있고 마당의 우물돌은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선 정면에 안채, 왼쪽에 아래채, 안채 오른쪽 뒤편으로 김호장군 사당이 모셔져 있다. 원래 사랑채가 동쪽에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자리만 남아있다.
종부 이영숙씨는 “시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원래의 집은 ㄷ자 기와집이었으며 아래채의 지붕도 기와였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전소가 되었고 전쟁 중 응급조치로서 초가로 급하게 짓게 되었다고 해요”하는 말에 안채의 규모에 비해 아래채의 규모가 조화롭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은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제대로 복원해야 한다고 건의도 해 봤어요. 증거 자료를 제시하라는 바람에 무산되었지만요. 구증보다 실질적인 증거가 필요한거겠지요” 한다.
“지금의 대문자리에 중문이 있었고 지금처럼 안채가 바로 보이는 대문의 형태가 아니었다고 해요” 시아버지가 병환 중이었던 1977년 중요민속자료료 지정이 되고 당시의 트렌드였던 볼거리로서 초점이 맞추어져 용인민속마을의 초가개념이 적용되었던 것이다. 원래 옛 가옥의 형태를 더욱 시원스레 살 릴수 있었으면 바람을 가져보는 대목이었다.
안채는 앞면 5칸, 옆면 1칸 규모에 왼쪽부터 부엌, 방, 대청, 방으로 단순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집을 처리한 기법들은 옛 법식을 따르고 있고 대청 앞에는 문짝을 달았다. 아래채는 앞면 3칸, 옆면 1칸이며 지붕은 초가지붕이다. 굴뚝을 부뚜막 한쪽에 설치해 구성의 특이함을 보이고 있다.
한편, 사당은 국가에서 김호 장군의 탁월한 공적을 인정해 불천위를 명한 사당이다. 따로 담장을 둘러 세운 맞배지붕집으로 안쪽을 모두 터 놓은 통칸이다.
이 고택은 가장 오래된 민가 건물 중 하나로 옛 건축 수법과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 중요한 연구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사람이 들락거리고 밟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근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해 예약제로 한옥체험업으로 운영하고 있었던 이씨는 “원래 대가족이 살던 집이었는데 혼자 있으니 사람이 들락거리고 밟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한다.
불을 지펴야 자연건조도 되고 순환이 된다며 더울때도 장작불을 계속 땠다고 하는 이씨는 “저 혼자 있어도 잠시도 쉬지 않고 닦고 쓸어요. 하하. 고택협회경리보수팀에서 얼마 전 다녀가면서 구석구석 손질이 너무 잘 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할 정도예요. 고택 체험을 하고 간 사람이 다시 찾지요”한다.
한편, 지난 14일, 고택을 찾은 날 고택·종택 명품화 지원사업에서 김호 장군고택체험 프로그램이 이번 정기추경때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올해부터 사업이 실시되는 것이다.
그 준비작업에 더욱 긴장하고 있는 그녀는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 문중에서 전해오는 책자 및 자료를 바탕으로 관광객의 이해를 돕기위해 각색하는 부분에 나도 참여하고 김호 장군과 남산 주변의 경관도 볼 수 있는 영상물 제작에도 의견을 개진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예정이다”고 전했다.
“경주시의 관심과 함께 여러 사람이 와서 보기도 하고 내가 힘 닿는 데까지 알리면서 이 고택을 가꾸고 지켜 우리 아들들이 대를 이어 이 고택에서 살기를 원한다. 그동안 나는 더 열심히 할 것이다”
경주시의 지원이 사실은 어깨가 무겁다며 어떻게 운영의 묘를 살려 관리를 잘할까가 고민이라는 이씨. “내 안목이 명품고택 사업에 미치지 못할까 봐 걱정”이라는 그녀는 김호 장군 14대 종부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