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하를 지난 13일, 경주국립공원 서악지구의 선도산 자락에 위치한 도봉서당挑峯書堂을 찾았다. 일찍 찾아온 초여름의 더위는 진했다. 정자인 연어재 마당 한켠에서는 신록을 자랑하는 사철나뭇잎이 유난히 반짝거렸고 복원한지 100여년 된 도봉서당은 태연하고 의젓해 번잡한 ‘삶의 저편’을 조용히 돌아보게 했다. 도봉서당은 조선 전기의 문신 불권헌不倦軒 황 정黃玎 선생의 학덕과 효행을 높이 기리기 위해 건립한 ‘묘하재실墓下齎室’이었다. 도봉서당은 건축적 측면에서는 묘하재실에서 출발해 서당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인 서악리삼층석탑을 지척에 두고 있었으며 신라 제47대 왕인 헌안왕릉과 나란히 황 정黃玎 선생의 묘소가 있어 역사적 장으로서도 그 기운이 예사롭지 않은 곳이었다. 황 정 선생은 덕과 명망이 높아 청백리에 빛났으며 역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이에 선생의 후손들은 꾸준한 관심과 애정으로 최근까지 도봉서당 일원의 복원을 진행하며 관리하고 있었다. -평해 황씨 경주입향조 황천부의 4대손 황 정黃玎 선생 평해 황씨 시조는 학사공 황 락 으로서 신라 유리왕 4년 평해 월송정에서 대대로 살았다. 여조, 즉 고려와 조선조에 와서는 검교공 황온인에 의해 평해 황씨의 본관으로 정착한다. 이후 황온인의 7대손이자 경주입향조가 된 황천부는 평해 월송정에서 ‘관지내금장’으로 있을 당시 오도순영사로 순행을 하다가 경주에 복거(살 만한 곳을 가려서 정함)하고, 입향조가 되었다. 경주입향조 황천부의 4대손이 황 정 선생이다. 다시말해 황 정 선생은 황온인으로부터는 11대손이 되는 것이다. -수학修學과 교육에 힘쓰고 권세와 금욕金慾을 배제, 청백리의 표본으로서 후세에 귀감 황 정黃玎(1426~1497) 선생은 1426년(세종 8) 남중리, 지금의 교동에서 출생하고 자는 성옥, 호는 불권헌이며 1464년(세조10)이던 49세에 사마시와 문과에 합격한 이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경상감사 김종직의 권유로 벼슬에 나가 성종조에 혜민서 교수가 되었으며 승문원 교검,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으며 그 후 1487년 (성종 18) 승문원 교리, 경상도 도사를 거쳐 판관을 역임하고 성균관 전적을 거쳐 1493년(성종 24)시강원 찬독관(성종의 아들 딸인 왕자군을 가르치는 역할)을 지내다가 관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낙향해 1497년 연산군 3년에 서거했으며 현재 도봉서당에서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선생의 17대손이자 이 문중의 유사이기도 한 황한섭(72)어르신은 “안타깝게도 선생의 문집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지금 전해지는 선생에 대한 자료는 그간 후손들이 성균관에서 수집한 자료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 자료를 근간으로 ‘불권헌 선생 실기’를 단행본으로 펴냈다”고 설명했다. 선생은 덕행과 도덕, 수학修學과 교육에 힘쓰고 관직에 있을때는 권세와 금욕金慾을 배제하고 청백리의 표본으로서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김종직 선생, 윤필상 선생 등과 교유...도봉서당과 연어재에서 시운詩韻 나눠 황한섭 어르신은 “선생과 교유한 인물로는 점필제 김종직 선생,윤필상 선생 등이며 특히 김종직 선생과는 시운의 교류가 있었다”며 “김종직 등의 인사가 황정 선생을 찾아 경주에 오면 당시 대나무가 많았던 이곳 도봉서당과 연어재에서 담소를 나누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전했다. 황 정 선생과 김종직 선생이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 화답하며 나눈 시운이 기록에 남아있는데 아래는 그 중 한편이다. ‘연비어약(군자의 덕이 널리 미친 상태)하늘과 함께 빛나니/ 물위 근원 멀고 멀어 연못은 가득하다/ 봉창의 맑은 바람 홰나무에 불어오고/ 청아의 끼친 혜택 월성의 곁이로다/ 애벌레가 변화함에 사람이 가르침을 알며/ 사슴이 높이 뛰며 세상의 상서로다/ 가을 서선 파한 후에 자리를 같이하며/ 푸른 대나무 바라보며 술잔을 함께 한다// -도봉서당 挑峯書堂, 연어재鳶魚齋, 상덕당常德堂 등 7동으로 구성 도봉서당은 황 정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1545년(중종 1) 추보재追報齎라는 이름으로 후손들이 건립한 제사齊舍 건물이었다.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많은 손상을 입었으며 1915년에 추보재가 있던 자리에 새로이 서원의 형태로 건물을 재배치하고 도봉서당이라 명명하고 지금에 이른다. 황한섭 어르신은 “선생의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수호하다가 2003년부터 도봉서당에 관한 전국의 문화재자료를 바탕으로 수집해서 경상북도에 알리고 문화재 발굴과 자료 수집을 3년에 걸쳐 한 결과, 2006년 2월 16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7호로 지정되었으며 도봉서당 외 연어재와 상덕당 복원의 진척이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도봉서당 일원은 외삼문인 숭앙문, 강당인 도봉서당, 동재인 추보재, 서재인 연어재, 사당인 상덕당常德堂을 비롯해 총 7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당을 앞에 두고 사당을 뒤에 배치하고 있다. 이런 배치 형식은 경상도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 강당인 도봉서당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앞면 5칸·옆면 1칸 반이며 두칸의 대청에 오른쪽 방 한 칸, 왼쪽방 두 칸을 각각 두고 있다. 이 방들에는 유생들이 기거했다고. 앞쪽에 툇마루를 두고 옆쪽과 뒤쪽에 쪽마루를 두었다. 복원 이후에도 여러번에 걸쳐 중수했다고 한다. 황한섭 어르신은 “2007년부터 복원이 시작되었는데 원래 사당인 상덕당은 2008년에 복원 되었고 지금은 신위가 모셔져 있지 않다. 그래서 묘제를 위주로 지내고 있다”고 했다. 상덕당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의 형식으로서 앞면 4칸·옆면 1칸 반이다. 서재인 연어재는 2011년, 원래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남쪽과 동쪽을 각각 팔작지붕으로 처리했다. 동재인 추보재는 2010년 복원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여러 건물 가운데서도 연어재를 통해 건축미를 느낄 수 있으며 묘하재실의 기능에 맞도록 창호와 마루가 설치된 점에서 건축적 가치를 살필 수 있다. 인상 깊었던 또 하나는 오래되어 보이는 우물이었는데 사당과 동재 사이에 위치한 이 우물은 ‘100년이 넘었다’고 전해지고 있었고 아직도 사용하고 있었다. 일찍 찾아온 초여름의 열기는 우물을 보는 순간 청량감 탓인지 다소 더위가 희석되는듯 했다. 그리고 너른 바위 하나가 선생의 묘소 올라가는 길에 있었는데 이는 영남의 유생들이 과거를 보러 갈때 선생의 묘소를 찾아 배알 하고 이 바위를 만지고 갈면서 ‘과거 급제’의 소원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매년 음력 10월 15일, 수백년 전통 그대로 묘제 지내고 있어 황 어르신은 “매년 음력 10월 15일 도봉서당의 뒷산에 있는 묘소에서 묘제를 지내고 있다. 묘제는 아직까지 수백년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묘소가 가까이 있어서 묘소에 향을 피워서 모셔와서 묘제를 지내고 있다”고 했다. -평해 황씨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수호하다 울산에서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자문을 해주신 황한섭 어르신은 2002년부터 도봉서당의 향내 총무로서 세인들이 잘 모르는 황 정 선생의 거룩한 업적을 일깨우고 도봉서당 일원의 복원 및 중수를 진행하는데 있어 문중의 여러 후손들과 노력해 지금의 결실을 얻어낸 이다. 현재, 도봉서당은 신라문화원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신라문화원이 고택스테이를 실시하고 있는 곳 중 하나다. 고택스테이는 주로 동재와 서재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도봉서당 일원은 황 정 선생의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수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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