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당쟁의 시대, 당파를 넘나들며 폭넓은 존경을 받아온 인물이 조선중기 경주에 있었다. 바로 청백리에 빛나는 정무공 최진립 장군(1568∼1636)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 전란에서 공을 세운 유례없는 충신이었고 1647년에는 청백리로 녹선된 뛰어난 관리였다.
청렴과 겸손을 갖추어도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 있는데 공은 그렇지 않았다고 전한다. 최씨 집안을 일약 경주 명문가의 반열에 올린 정무공. 공의 의기와 충의는 세세토록 이어져 지난 5일 경칩의 절기에 찾은 생가인 충의당忠義堂 곳곳에서 공의 진한 나라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때마침 200여년 된 홍매화가 막 꽃망울을 터뜨릴 기세였다.
충의당은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492번지에 있는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생가로 1993년 2월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기념물 제99호로 지정된 바 있다. 현재 경주시의 명품고택으로 지정돼 고택을 체험하게 하고 있다.
청백리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 장군...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 전란에서 혁혁한 공 세워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계종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활약을 한다.
이듬해(1594년 27세) 무과에 급제해 정유재란 때 울산전투에 참전해 큰 공을 세웠다.
1607년 오위도총부 도사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그 뒤 경흥도호부사, 공조참판을 거쳐 1630년(인조 8) 경기수사가 되어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했으며 1634년(인조 11) 전라수사를 지냈다.
공주 영장으로 있을 때 청의 침범으로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났다. 충청관찰사 정세규가 출정하면서 당시 69세였던 연로한 정무공에게 전쟁을 치르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라고 참전을 만류했으나 경기도 험천에 이르러 보니 정무공이 먼저 와 있었다고 한다.
이미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으며 적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잘 훈련된 청나라 군대를 당해 낼 수 없었다. 목숨이 위태롭게 되고 평소 그림자처럼 따르던 두 종 옥동玉洞, 기별奇別과 함께 1636년 12월 장렬히 순국했다.
정무공 사후 이듬해 인조는 병조판서에 증직시켰고 정려를 내렸다. 1651년 인조는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하사하고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관직자에게 주어진 호칭인 ‘청백리’로 녹선한다.
한편, 충의당 인근의 1699년 창건된 용산서원(도지정 기념물 88호)에 제향되는데 용산서원은 조선시대 국왕으로부터 편액·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전국 3대 사액서원중 하나이다.
또 숙종 37년(1711) 향리 용산에 숭렬사우의 사액을 내리고 원호를 용산서원이라 한다. 무인으로서 향사된 경우는 희귀하지만 정무공은 장군이면서 공조참판의 벼슬을 한 문무를 겸비한 선비였기 때문에 향사에 모셔졌다. 이는 드문 경우로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향사된 예가 있다.
이에 최진립은 국가적 영웅으로 떠오르고 경주 최씨는 명문가의 기틀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남부지방 양반집의 전형인 튼 ‘口’자형의 배치형태 지닌 충의당
충의당은 정무공이 살았던 곳으로 가옥의 사랑채에 해당된다. 처음에는 당호를 흠흠당이라 했는데 1760년경 건물을 수리한 후 충의당으로 그 이름을 바꿨다.
건물은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이 고택의 구성은 정면의 충의당을 중심으로 가구는 3량가의 간결한 구조이다. 사랑채에서는 제사를 모시고 충노 둘의 신위도 있다.
충의당은 300여년 전 중건이 한차례 있었으며 300여년 자연목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사랑채 뒷면 정침(안채)은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一’자형 건물로 좌로부터 부엌·안방·대청·건넌방이 연접되어 있다. 광채와 중사랑채인 4칸의 흠흠당이 남부지방 양반집의 전형인 튼 ‘口’자형의 배치형태를 취하고 있다.
흠흠당은 정침 우측에 있으며 중사랑채 기능을 가진 건물로 4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 흠흠당 오른쪽에는 제향공간인 3칸의 사당이 있어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전형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정무공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불천위 사당 충렬사는 작은 사당이었으나 허물어져 100년 후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300년의 시간을 흘렀음을 고색한 단청이 입증해준다.
사당은 전면에 툇간을 둔 3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데, 상부가구는 민가의 사당으로서는 매우 화려하고 섬세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충의당 인근에는 정무공을 추모해 세워진 용산서원龍山書院과 인조 18년 (1640)에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던 정려를 받아 세워진 정려비각이 있다.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 두 명의 종에 대한 제사 지내
이조리 충의당 종가에서 매년 12월 지내는 정무공의 제사는 일년 중 가장 큰 행사다. 나라에서 불천위 제사를 내렸고 후손들은 수 백년째 그 뜻을 기리고 있다.
그런데 이 제사의 백미는 정무공의 제사가 끝나면서 부터다. 정무공의 제사상을 그대로 마루로 옮겨 두 명의 종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평소 그림자처럼 따르던 두 종 옥동과 기별에 올리는 제사인 것.
종손인 우산愚山 최채량 선생은 “어떻게 종에게 양반이 절을 올리느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우리는 정무공과 같이 친조상과 다름없이 매년 제를 올렸다. 그들도 전란에서 정무공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으므로 충노에 대한 제사인 것이다”며 더불어 사는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우리가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종가이다. 셋째아들이 교촌 최부잣집이고 넷째아들이 수운 최제우 어른의 집안이다”고 하는 최채량 선생은 더욱 기품이 있다.
“청렴하고 삼가함을 내가 공경한다”
인조가 1630년 공조참판의 벼슬을 내리는데 정무공은 그런 중책을 무인으로서 맡을 수가 없다고 하자 ‘뭇사람이 우러르고 굳센 절개 공경하노라. 재물을 좋아하는 사람을 벗하지 않고 청렴하고 삼가함을 내가 공경한다’는 글을 내린다. 이 글을 종손인 최채량 선생이 사당대문 좌우에 글씨를 써 공의 절의를 상기시키고 있다.
정무공이 손수 심은 450여년 된 회화나무가 하늘 높이 서 있어
이 고택의 대지는 1000여평이며 주변의 충의공원, 주차장을 포함해 약 3000평이다. 충의당 이외에도 최채량 선생이 세운 것으로 함께 전사한 충노 두명을 기리는 충노각, 그리고 종택 뒤편에는 정무공이 손수 심어 보호수로 지정된 450여년 된 회화나무가 하늘 높이 서 있다.
또 정무공 사당뒤에는 충노인 기별과 옥동의 불망비가 있으며 경주시의 남산권역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충의공원에는 장군의 동상이 건립돼 있다.
오는 4월 27일 정무공 유물관 개관과 함께 동상 제막식을 앞두고 있다.
사랑채의 바로 옆 경모각은 최채량 선생이 낙향해서 지은 건물로 현재 다실로 이용하고 있다고.
자세한 자문을 주신 충의당의 주인 우산愚山 최채량(81)선생은 경주유림의 지도자로서 경주최씨 중시조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14세손이다.
우산 선생은 고려대 문리대학 생물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담수회 경주지회장, 경주최씨 종친회 회장, 박약회 이사를 맡고 있는 한편, 충의당에서 고택을 보존, 정비하고 정무공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