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모내기가 시작된다는 절기상 소만인 지난 21일, 강동면 다산리에 있는 삼괴정三塊亭을 찾았다. 삼괴정은 임진왜란 당시 경주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동호東湖 이방린李芳隣 선생과 동생인 유린有隣·광린光隣 삼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7대손 이화택이 1815년(순조 15)에 건립한 정자다. 다산리에는 아직도 동호 선생의 청안 이씨 후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여느 시골마을처럼 모내기 준비가 한창인 마을은 다소 부산해 보였다. 초여름을 암시하는 태양은 따가웠으나 오월의 바람은 삼괴정 뜰의 향나무와 정자 입구의 괴나무 잎사귀에, 정자의 계자난간에 살랑이고 있었다. ‘흡’하고 숨이 멎을듯한 적요하고 순정한 삼괴정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건립한지 200년을 넘긴 삼괴정은 경주의 고택을 찾아 다니는 기자의 심미안을 흡족케 한 것이다. 정자를 수차례 오르내리고 거닐면서 그 해사한 품격과 여유로움에 홀딱 반해 버렸다.
삼괴정三槐亭, 1815년 건립한 조선후기 정자
삼괴정三槐亭은 경주시 강동면 다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자로서 1992년 7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8호로 지정되었다. 이 정자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경주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동호 이방린 선생과 동생인 유린·광린 삼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7대손 이화택이 1815년(순조 15)에 건립한 정자이다.
1812년 정자 짓기를 합의하고 3년여의 기간끝에 계유년 마침내 12칸의 큰 정자를 완성했다. 삼괴정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삼형제가 의병으로 출전하기에 앞서 현재의 정자터에 괴나무(회화나무) 한 그루씩을 심어놓고 출전한 것에 연유한다.
삼형제가 심었다는 괴나무는 고사해 지금은 없었지만 그 뿌리가 자라 다시 자라 신록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정자는 본채와 외삼문으로 구성된 배치이고, 전체적으로 ‘丁’자형의 평면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은 홑처마에 맞배지붕을 잇댄 가적지붕 형식이다. 경사진 대지에 터를 잡아 전면은 누각으로 꾸미고, 출입은 뒤쪽으로 하게 했다. 전면에 대문이 있고 왼쪽에 일각문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경주에서 의병 일으켜 공을 세운 동호이방린 선생
이방린 선생은 경주판관이었던 박의장, 의병장 권응수와 함께 영천성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웠는데, 이때 화포장火砲匠이었던 이장손이 만든 비격진천뢰를 사용해 경주성을 탈환했다. 이는 ‘관감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방린 선생은 계연 전투에도 공을 세우고 안동대도호부 판관 겸 부사를 역임했다.
한편, 당시 그 뛰어난 공적과 위대한 업적은 후손들의 자랑이었지만 조정에서는 적절한 포상이 없어 향인들이 두고두고 개탄했다고 전한다. 형제들의 여유만만한 태도와 더불어 돈독한 우애와 남다른 효성은 두고두고 청안 이씨 가문의 모범이 되었다.
대청 한복판 뒤쪽으로 놀라운 공간이…독특한 공간구성 수법 사용
평면은 정면 3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으나 특기할 사항은, 다시 대청의 한복판 뒤쪽으로 ‘필경재必敬齋’칸이 뒤쪽으로 더 빠져 나가도록 하고 높이를 대청보다 50Cm 정도 높게 위치하도록 독특한 공간구성을 한 ‘놀라운 공간’이 나타난다.
일자형 평면의 구성에서 세로로 2칸의 누마루방이 접해있어 매우 특이한 평면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 또한 정자 전면에는 기둥에서 돌출한 누마루 형식의 툇마루가 있고 계자각 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청마루아래에는 정자를 받치고 있는 장정의 몸통보다 굵은 원기둥들이 듬직하게 무게 중심을 잡고 있었다. 그 위에는 작은 원기둥과 마루 위 중앙 3곳에 팔각기둥을 각각 세워 건물의 격을 한층 높이고 있었다.
필경재必敬齋, ‘화수당花樹堂’, ’포죽헌苞竹軒’
건물의 정면에 삼괴정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2개의 방에도 각기 현판을 달았다.
대청의 필경재는 이방린을 의미하며 상청上廳이라 부르고 있으며 좌,우측방은 ‘화수당’, ’포죽헌’이라 하여 두 동생을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화수당은 한달에 한 번씩 화합하듯이 큰 자리를 마련했다고 하며 의로움을 일컬었다.
포죽헌은 정자의 토대가 더부룩하게 자란 대나무 같이 견고하고 상부의 치밀함은 무성한 소나무같다는 뜻으로 제목을 붙여 시가를 읊고 노래를 부르고 즐겼다고 한다. 뒤편 필경재에서는 예법과 음악을 또한 즐겼다고 한다.
이방린 선생의 22대손이자 문유사인 이진준(53)씨는 “백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필경재 한켠이 풍우에 기와가 벗겨지고 서까래까지 떨어져 붕괴의 위험에 처했다. 후손인 이용관은 자재와 경비를 부담하고 목공을 구해 일을 시작하고 문중노소가 힘을 모아 관리해 수리를 마쳤다”고 전했다.
문화재 지정이후 보수할 당시의 고기와가 뜰의 한켠에 차곡차곡 보관돼 있었다. 정자의 출입문인 대문은 외삼문 3칸으로 가적지붕 형식의 대문으로 정자의 본채 형식을 그대로 축소한 양식의 대문이다. 이 대문의 양식은 전국에서 두어군데 뿐이라고 한다. 건물이 서향의 배치인 관계로 정면의 창호에는 햇볕을 차단하며, 우천시 비를 막을 수 있도록 외부에 판장문을 덧대었다.
지금도 장마철이면 아궁이에 군불 지펴 습기 제거
이진준씨는 “이 동네는 청안 이씨의 집성촌으로 정자를 관리하던 하인이 살던 사택도 있다. 이 관리사동도 중수를 여러번 거쳤다. 예전에는 초가 형태였는데 후손들이 기와로 바꿔 지었다. 이 부속체는 맞배지붕에 방형기둥을 사용한 일반적인 형식이다. 예전에는 하인을 두고 삼괴정의 관리를 했으나 지금은 삼괴정 주위에 거주하고 있는 인근 후손들과 일가들이 2년에 한번씩 유사를 선임해서 조상들이 남긴 농토와 함께 삼괴정을 관리하고 있다” 고 설명했다.
이씨는 또 “정자의 양쪽방은 지금도 우리 문중의 행사시 손님들이 묵는다. 음력 섣달 그믐날(설날 하루전)에 문중 어른을 모시고 한해를 보내는 마지막 인사로 절을 드린다. 예전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정자에서 바둑도 두고 장기도 두고 했으나 이제는 경로당에 가시니 비워져 있다”
“다산리 삼괴정 뒤산에는 이방린 선생의 묘소가 있다. 원래는 묘소 아래 재실이 있었으나 오래돼 붕괴되었다. 매년 시월 초열흘날 묘제를 모시는데 날씨가 좋을때는 묘소에 가서 직접 제사를 올리고 비가 오면 분향을 하고 삼괴정에서 모신다”고 했다.
삼괴정의 각 현판의 글씨가 오랜 시간탓인지 흐릿하게 지워져 가고 있었는데 “경주시 문화재과에 현판의 글씨를 복원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에 대해서 답변이 늦어지고 있어 애가 탄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무방비로 전선들이 노출되어 있어 정자의 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전선을 감추는 전기공사가 시급하다”며 부속건물인 관리사동도 누수가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지금도 장마철이면 습기가 많아서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 방의 습기를 제거하고 있다”는 그의 말에서 삼괴정에 대한 진한 애정이 묻어났다.
외삼문의 형식과 강당 기능을 한 서원의 배치형식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삼괴정도 서원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본채의 규모가 일반적인 정자의 규모보다 크게 지어졌던 것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삼괴정은 순수한 정자로서 지어진 것보다도 선조를 기리며 학문을 도야하는 추념의 성격이 강하게 내포된 건물인 것이다.
농번기에도 불구하고 자문을 구해주신 청안 이씨 영남파 22대손이자 동호 이방린 선생의 13대손인 이진준 (53)씨에게 감사 드린다.
한편, 최영기 건축학박사의 ‘귀래정歸來亭과 삼괴정三槐亭의 건축특성’ 중에서 일부 내용을 인용했으며 청안 이씨 신재공파 삼괴정 문중에서 발간한 자료집을 참고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