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동부동에 있는 경주경찰서 맞은편의 구교육청(현, 삼락회관) 건물에 가려져 도무지 그 진가를 드러내지 못하는 700여년 세월을 버텨 온 고건축물이 하나 있다. 1985년 8월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된 ‘동경관東京館’. 이는 고려 때부터 내려온 객사의 부속건물로서 경주 객사를 달리 동경관이라 불렀다. 객사는 고려때부터 있어 온 지방의 중요 관청이다. 조정의 고관이나 귀빈이 오게되면 숙소와 동시에 연회장으로 사용하고 고을의 중요 문물이나 서책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특히 경주의 동경관은 웅도답게 객관의 규모 또한 웅대하고 장엄했다고 한다. 지금은 각종 건물이 무질서하게 들어서 있어 주변 경관이 우중충하다. 동경관으로 들어가는 길마저 확보되지 않아 동경관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무색하다. 구 교육청 마당을 거쳐 좁은 모퉁이를 돌아가야 겨우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웅장하고 건장한 위용에 비해 생뚱맞게 대접받는 듯해 안쓰러운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니 누가 여기가 고려와 조선조를 통하여 7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깊은 관청건물이 남아 있음을 알겠는가.’ -경주 객사, 동경관의 변천약사 동경관이란 동경東京의 객관客館이란 의미다. 경주 객사인 동경관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읍성 관아 건물 가운데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수령이 집무하는 동헌보다 규모가 더 컸다. 정청을 비롯해 동서익실東西翼室등 총 100여 칸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동경관은 당시의 경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관아였던 것이다. 객사는 단순히 내왕하는 관원이나 양반들이 묵는 곳이 아니라 왕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었다. 건물을 옮기기 전, 동경관 정청에서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조선 태조의 위패를 모시고 망궐례를 갖추던 곳이었다. 망궐례는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각 지방의 관원이 궐패闕牌에 절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왕명을 받든 사신을 영접하고 유숙하는 기능 이외에도 신성시 여긴 곳이 바로 객사였다. 동서쪽 건물은 6관의 관방이라 하였으며 그곳에서 신라 옥피리를 비롯해 청동제 화로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경주 객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와 조선조의 수차례 화재로 인해 지금의 모습이 전해진다. 고려 충숙왕 7년(1320) 화재로 객사의 상방上房과 대청 등 71칸이 소실되었다는 기록이 처음 보인다. 객사는 1590년 화재로 소실되었기 때문에 임란 때 일부 건물과 초석만 남아 있었다. 선조 35년(1602)에 정청 및 동서헌을 지었다. 영조 2년(1726)에 부윤 조문명에 의해 객사가 중수되었고 정조 10년(1786)에 부윤 김이용이 부임해 새로 지으니 지금의 객사 건물이다. 1907년에 대청과 동·서헌의 일부 건물을 변경하여 공립경주보통학교 교사로 활용하고 다른 부속 건물은 헐었다. 1922년에 최준 등이 결성한 경주고적보존회에서 신라 유물 등을 수집해 이곳에 전시하며 이용했다. 1952년에 경주교육청을 객사 서편에 신축한다는 명목으로 기울어져있던 객사 대청(솟을대청)과 동헌을 철거한다. 서헌 15칸은 헐어서 동쪽으로 약간 옮겨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경관, 일제강점기 저들의 관청 건물을 지으면서부터 헐리기 시작 동경관은 일제강점기 저들의 관청 건물을 지으면서부터 헐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정청과 부아 건물만은 남겼으나 시가지로 변하면서 객관의 서헌西軒만을 이곳에 옮겨 다시 세운 것이다. 부아府衙건물은 구 박물관으로 쓰이다가 현재 경주문화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동경관의 원래 건물은 앞면 5칸과 옆면 3칸의 단층 기와집 세 채가 이어진 총 45칸의 규모였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었다. 김기조 경주문화원장은 “해방후 일본, 만주, 중국 등에서 경주역에 내린 귀환동포들이 당장 고향으로 가지 못해 갈 곳이 없자 객사에서 일시 머물렀다. 또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이 내려와 오 갈 데가 없자 동경관에서 장기체류가 불가피했다. 땔감이 필요하자 마룻바닥과 문짝까지도 떼어내서 불쏘시개용 땔감으로 사용했다”고 생생한 증언을 통해 회상한다. 급기야 동경관 정청건물은 1950년초에 교육청을 신축한다는 구실로 관리들의 무지로 인해 무참하게 헐리고 만다. 이에 관청에서는 정청중에서 마지막 좌익현만 남자 마저 없앨 작정을 했으나 당시 경주 유인儒人중 한 사람인 유인달씨와 몇몇이서 고려때부터 있던 건물의 중요성을 각인시켜 지금의 좌익현 건물을 보존하기에 이른다. 좌익현 건물을 오른쪽으로 이건하고 그 자리에는 구 교육청 건물이 들어선다. 지금의 동경전은 웅장하지만 무엇인가 좌우의 균형이 맞지 않은 인상이다. 이 건축물의 왼쪽은 팔작지붕이 드러나 있고 오른쪽에는 맞배지붕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건물을 이건하면서 가운데 정청인 솟을대청이 없어져 버렸으므로 기형적인 지붕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이 한 채의 건물에 수상하게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최석신이 쓴 ‘동경관東京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으나 지금 그 현판의 행방이 묘연하다. 최석신은 조선조 사람으로 이름을 떨쳤던 당대 경주 최고의 서가였다고 한다. 한편, 고종 19년(1882)에 부윤 정현석이 쓴 ‘동경관’이란 현액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소실된 나머지 두 채의 주춧돌과 3층석탑, 돌기둥 남아 있어 1961년 경주문화원이 발족하면서 동경관을 관리하게 되고 그 후 구교육청이 관리한다. 현재는 경주문화원 산하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금의 동경관은 풍우에 의한 목재와 단청의 부식이 심한 편이다. 소실된 나머지 두 채의 주춧돌과 3층석탑, 돌 기단과 양각의 부처상이 새겨진 조각, 석주는 경찰서 앞마당과 구교육청의 입구화단에 남아 있다. 망궐례를 올리던 망궐전의 돌기둥인 석주에는 이끼가 연하게 자라고 있었다. 부속건물이 매우 많았으며 그중의 하나인 정자는 사진으로 남아 있다. 김 원장은 “원래는 지금의 동경관에 있는 담과 길이 없었고 숲이었다. 일제강점기 ‘야마구찌병원(지금의 화랑수련원)’이 들어오면서 숲을 없애고 입원실 , 사택, 정원이 들어서면서 이 일대가 변모되었다”며 그 이후 지금의 도로가 생겨나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김 원장은 “원래의 모습인 3채의 동경관을 복원해야 하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고려조선의 관영건축물로서 태조 이성계의 위패를 모셨던 정신적인 곳인 동시에 전국의 객사중에서 역사성과 건물의 위용과 가치로 볼 때 손에 꼽히는 건물이다. 더구나 복원 할 수 있는 옛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고 석물들도 경찰서나 구교육청 마당에 보존이 되어 있으며 한 채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니 비교적 복원이 용이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 “정청의 본래 자리였던 구 교육청(지금의 삼락회관)을 정리하고 시민들 관심의 중심에 둬야 한다. 구 교육청의 건물을 없애면 동경관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보수 공사를 원활하게 할 수 있다. 지금은 그 모습이 가려져 경주 시민들조차 잘 모른다”며 동경관 복원의 당위성과 시급함에 대해 강조했다. --------------------------------------------------------------------- 김기조 경주문화원장님의 자문과 안내에 깊이 감사드리며 향토사학자 황재현의 ‘동경관의 어제와 오늘(1995)’에서 인용한 구절이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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