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여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월성주사댁月城主事宅’은 전형적인 부농의 살림집 모습이다. 월성손씨月城孫氏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의 11대 지손 손종호孫鍾昊가 1780년경에 건립한 조선 후기 부호가 주택으로 강동면 단구리(앞실)에 있다. 조선시대의 고가로서 당시 민가로서는 규모가 크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이 고택은 문화공보부 전통가옥 제6호로 지정된 바 있으며 2000년 4월 10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곡성 모양의 성봉인 도음산 너머는 포항시 흥해읍이다. 경주시와 포항의 경계지역인 앞실마을은 도음산이 감싸주고 있고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대나무 숲 뒷산이 어여쁘게 주사댁을 품어 감싸고 있는 형상은 양택陽宅의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주사댁 앞 개울 건너에는 너른 벌판이 있고 대청마루에서 올라보면 봄이 오는 들판이 보인다. 한편, 수 십명의 하인들이 기거하고 한 세대를 풍미했던, 인심 후한 부농의 흔적들을 이 고택의 곳간과 부엌, 사랑채와 안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궁내부주사宮內部主事’를 역임한 손명수 이후 ‘손주사댁’으로...,
손중돈 선생의 둘째아들 손영의 7대손인 손인걸과 손대걸 형제가 앞실마을 입향조入鄕祖다. 손인걸의 손자인 손수민이 정미업으로 크게 부를 쌓아 당대에 천석꾼을 이뤘다. 이에 손수민의 아들인 손종호가 1780년경에 월성주사댁을 건립하고 당호를 ‘교롱암敎聾庵’이라 지었고 ‘도음서사禱蔭西舍’라고도 불렀다.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민가로서 3년의 공기가 걸렸다고 한다.
건립자인 손종호의 손자인 손명수는 1866년(고종 3년)문과에 급제하고 ‘궁내부주사宮內部主事’를 역임하는데 벼슬에서 물러난 뒤 ‘손주사댁’이라 불리워진다.
이 집은 이 일대의 도음산이 병풍같이 감싸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남향집으로 겨울이면 따뜻하고 여름이면 서늘한 풍수법도에 잘 맞는 주택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동출서류’ 즉, 동쪽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흐르는 개천 덕택인지 200여 년간 천석꾼으로서 인심좋고 후덕한 집안이라는 소문이 자자해 후손들의 사람 됨됨이가 좋고 재물이 넉넉한 집안으로 선비가를 이뤘다.
자수성가한 후손들 배출
후손들 중 손처구의 5대손인 손진원은 우리나라 초기 무역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처구의 종형인 손양구의 자손 손도익은 경동그룹을 창립, 경동탄광, 경동나비엔, 울산도시가스 등의 에너지 업체를 훌륭하게 이끌어 재벌 그룹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경동 그룹의 총수인 손경호 회장은 앞실마을 입향조인 손인걸의 8대손이다. 또 손종호의 4대손인 손관익은 복지사업으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 받은 바 있다. 이외에도 자수성가한 후손들을 다수 배출했다.
이 종택의 현재 소유자는 주사댁 건립자 손종호의 5대 장손인 손정호로 경주 중·고와 고려대 법대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삼덕무역 상무이사와 태주물산 대표이사 등을 거친 인물이다. 지금은 낙향해 조상들의 묘소를 돌보고 전원생활을 즐기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로 들어가는 입구가 두 곳, 전국적으로 드문 경우
전통적 공간구분 법식 등 전통적 주거 요소들을 잘 간직한 반면 외래 주거 문화의 요소들도 적절하게 도입하고 적용한 이 고택은 당시 지형과 좋은 기운, 즉, 풍수지리를 꼼꼼하게 따져서 지은 집이다.
대지 600여평의 월성주사댁은 남녀가 유별한 집 구조로 남녀의 처소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 왼쪽에 안채와 오른쪽에 사랑채를 좌·우로 배치하였으며, 각기 담을 쌓고 출입문도 따로 달아 별도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의 마당 가운데에는 초가로 된 방앗간채가 있는데 디딜방아와 외양간이 있고 사랑채의 마당 동쪽에는 초당이 있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ㄱ’자형 평면으로 서쪽으로 꺾이는 부분에 도장채로서 3칸 부엌이 있다. 부엌에서 남쪽으로 꺾이는 부분에 방·광·광·방으로 이어져 있다. 부엌은 보통의 민가 2배정도의 규모로 쌀과 된장등을 보관하고 크고 오래된 옹기들이 지금도 있다.
도장에는 옛 살림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곡식단지, 쌀단지 등을 보관하고 있었으며 200여년 된 민가로서는 규모도 크고 살림하기에 편리하게 지어졌다. 동쪽으로 각각 2칸의 안방과 대청, 그리고 건넌방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로 통하는 대문은 3칸 규모이고 대문 양쪽에 광이 딸려 있다.
안채는 이 지방 큰 집들과 공통되는 격식을 갖추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앞면으로 튀어나온 부분에는 곳간채로서 넓은 곡식 창고와 고방庫房을 두어 당시에 살림이 풍족하였던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역시 ‘ㄱ’자형 평면으로 서까래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나무인 도리로 꾸며 향교나 서원의 건축에 주로 이용한 ‘굴도리집’ 맞배지붕 형식이다. 서쪽으로 꺾이는 부분에 부엌이 있고 왼쪽으로부터 방·방·대청 3칸이 일렬로 연결되어 있다. 부엌을 통칸으로 하고 남쪽으로 각 1칸씩 3개의 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남쪽에는 안채로 통하는 일각문이 있다. 사랑채와 연결되는 쪽문에 소죽을 끓이는 부엌이 있고 이로써 사랑채의 방 두 개에 난방을 하는 구조다.
대청 중앙 뒷벽에는 ‘구기신림술선이후舊基新林述先貽後’ ‘도음서사禱蔭西舍’라는 글씨가 씌어진 현판이 걸려 있으며 각 방 전면에는 ‘교롱암’, ‘덕재’德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현 소유자인 손정호씨는 “이 글씨는 작자가 정확치 않으나 이 집안의 인심이 후해 글씨쓰고 그림을 그리던 시인묵객들이 많이 다녀가면서 써 준 글” “‘교롱암’이란 5대조 손종호의 호를 따서 현판에 썼고 ‘도음서사’는 도음산의 서쪽에 있는 집이라는 의미다”라고 전했다.
150~200여년 가까이 천석꾼의 살림 유지, 원래는 마을에서 높은 지대에 있는 집
대청마루에 오르니 멀리 대나무밭이 보인다. 손씨는 “예전에는 대나무 밭 앞에 하인들이 거주하던 집이 너댓채 있었다. 차츰 이 집 앞의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했고 150~200여년 가까이 천석꾼의 살림을 유지했다. 모친이 30여년 전 까지는 이곳에서 기거를 했다”고 회상한다.
“집앞의 개천이 원래는 구곡으로 구불구불한 모습이었으나 방축을 하면서 곡선이 사라지고 홍수의 피해를 막기위해 길을 1.5미터~2미터 높였다”며 원래는 이 집이 마을에서 높은 지대에 있는 집이었는데 지금은 상대적으로 낮아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고택 앞에는 수령이 이 고택의 나이와 비슷한 오래된 홰나무가(이 지역에서는 기와나무라고 부르는)가 있다. 예로부터 큰 집 옆에는 잡귀를 물리치는 의미로서 이 기와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한편, 동네사람들이 물을 많이 길어가기도 했다는 200년 된 우물은 지금도 깊고 맑았다.
월성주사댁에 얽힌 에피소드
손씨는 “한국전쟁 당시 포항전투가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을때 동네 사람들과 아홉 살이었던 나와 가족은 집을 비워두고 경주 시내로 피난을 갔다. 뒷산에 나무가 우거지고 그 산 아래에 위치해서였는지 작전본부로 쓰였다. 아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면 아군본부가 되고 인민군이 이 지역을 확보하면 인민군 본부가 되었다”
그런데 피난을 갔다 오니 이 집에 총알 자국이 하나 없었다고 한다. “우리집 근처에 큰 집들은 폭격을 맞아 사라졌지만 제일 크고 좋은 편이었던 이 집만은 건재했다. 그래서 주민들이 ‘저집은 대대손손 인심이 좋고 후덕한 집안이어서 피해가 없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