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면 유금리에 위치한 형제산 중 제산 자락에 자리잡은 동강서원은 조선 전기 중종 때의 명신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선생을 향사하고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5도 유림의 공의로 건립된 서원이다. 간간이 내리는 빗속에서 뜰에 서 있던 고색한 석등이 유난히 고즈넉했다. 1996년 경상북도 중요기념물 제114호로 지정된 이 서원은 2010년 세계문화유산 1324호로 등재돼 있기도 한 소중한 곳이다.
우리나라 서원 중 동강, 옥산, 안동의 병산서원 3군데가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됐다고 하니 우재 선생의 학과 행의 고귀함을 방증하고 있는 셈이다. 동강서원은 청백한 삶을 가풍으로 조성했으며 투철한 관료의식과 애민 사상을 지녔던 우재 선생의 정신이 원내의 곳곳에서 흐르고 있었다. 관직사회에서 최고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청백리에 녹선된 것도 바로 그런 맥락 아니겠는가. 현재 동강서원의 소유와 관리는 경주 월성 손씨 문중에서 하고 있다.
양민공 손소孫昭의 아들이자 1515년 청백리에 녹선된 우재 손중돈 선생
손중돈 선생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양민공 손소孫昭의 아들로서 본관이 경주이며 호는 우재愚齋. 휘는 중돈仲暾이고 자는 태발太發이다. 시호는 경절景節로서 선생은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익혔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가학을 철저하게 계승해 학자와 관료로 성장 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고 1483년 생원시에 합격한다. 1489년(성종20) 식년문과에 병과로 과거급제한 후 이듬해 경주 주학훈도에 근무한다.
예문관봉교와 여러 청환직(학식이나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시키던 홍문관 등의 벼슬)을 지냈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계림 손공이라고 했다. 1497년(연산군 3) 노부모를 가까이 모시기 위해 양산 군수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성균관 사예와 사복시정을 지냈다. 중종반정 직후 1509년 상주목사직을 완수하고 우승지로 조정에 복귀한다.
대신들이 공이 청렴 결백한 덕이 있다고 천거해 1515년 중종의 특명으로 가선대부에 오르고 1517(중종 12)에는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도승지를 세 번, 대사헌을 네 번 지냈으며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ㆍ함경도 네 도의 감사를 지내기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의정부의 정2품 관직이었던 우참찬(이조판서)과 세자 빈객이 되는 등 중요 요직을 두루 거친 후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1529년(중종 24) 향년 67세로 생을 마감한 선생은 40여 년의 세월 대부분을 관료로 봉직했다. 선생은 동강서원과 더불어 상주 속수서원에서 배향하고 있다. 속수서원은 중종반정 직후 상주목사로 재직해 선정을 베푼 선생에 대한 선정비와 함께 의성군 단밀면(현재 의성군)들이 세운 사당으로 생사당(生祠堂, 오늘날의 상주 속수서원)을 건립한 것이다. 이는 선생의 학자적, 관료적 면모를 높이 기리기 위해서였다.
우재 선생 도학의 철학...궁리진성窮理盡性
궁리진성窮理盡性은 우재 선생 도학의 철학으로서 주역 설괘전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사물의 이치를 깊게 연구하고 타고난 본성을 다해 천지 자연의 이치인 천리天理에 이른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선생은 당대의 석학들과 함께 성리학을 강론했고 조정안에 성리학을 확산 시키는데 부심했다. 성리학적 소양이 매우 깊은 이였고 그 소양을 관직이라는 매개를 통해 끊임없이 국정 운영에 반영하려 했다. 16세기 초반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관료로 평가되고 그의 학문을 두고 ‘이치를 궁구하여 천성을 다했다’고 평하고 있다. 선생은 집에 있을 때는 검소 절약하여 천장에 비가 새고 자리가 해어져 떨어져도 편안해했으며 공무에 있어서는 종합해 다스리는 일이 주도 면밀했다고 전한다. 또한 강직 청렴해 항상 청백리의 칭송이 따라 다녔다. 천성이 간결하고 조용하며 시끄럽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5도의 유생들이 뜻을 모아 창건, 무려 10여 년 세월이 소비된 거대한 역사
동강서원은 1707년(숙종33) 선생의 궁리진성의 도학을 연원으로 한 학덕을 기리기 위해 5도였던 경상, 충청, 전라, 함경, 황해도의 유생들이 뜻을 모아 창건했으며 강당 및 묘우가 완성돼 위패를 봉안했다. 동강서원의 건립은 무려 10여 년 세월이 소비된 거대한 역사였다고 전한다. 1717년(숙종43) 2월 하정에 향례를 시행했으며 1773년 누각인 탁청루를 건립한다. 이후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이에 묘우마저도 사라져 1901년(광무5) 선비들에 의해 설단이 합의되고 1908년 3월 하정에 설단 제향이 시행됐다.
1917년 활원재가 건립되고 순교당은 1957년 복원된다. 1979년 동재인 궁리재, 서재인 진성재, 신도비각을 동시에 건립한다. 1999년 누각인 탁청루는 국비 2억 4천만원을 지원받아 중창된다.
지금 원내에 있는 건물로는 묘우인 숭덕사崇德祠, 강당인 순교당諄敎堂, 신문神門, 동재인 궁리재窮理齋, 서재인 진성재盡性齋, 누각 탁청루濯淸樓, 임시강당으로 쓰였던 활원재活源齋, 신도비각, 전사청, 관리사인 포사 등이 있다. 묘우의 숭덕사와 강당인 순교당의 현액은 번암 채제공의 친필이라고 한다. 이들 건물군의 명칭들은 선생의 학문적 지향과 자취를 잘 담아냈다고 한다. 사당인 숭덕사에는 손중돈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순교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했다. 활원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현재는 서원의 큰 행사나 손님접대에 사용하고 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하정에 향사
우재 선생의 후손인 손익삼(82), 손국익(80) 어르신은 “서원의 누각인 탁청루 앞으로는 낚시질도 할만큼 형산강물이 빙 둘러 흐르고 있었다. 누각은 원래 5칸 겹집이었는데 훼철이후 복원 할 당시 신도비각을 먼저 건립해 터가 협소해 칸을 줄여 지금의 3칸 누각으로 복원했다”고 했다. 두 어르신의 말처럼 수양버들의 뿌리가 아직 남아 있어 강물이 흐른 흔적이 있었다. 누각이 있는 서원은 종합대학으로, 누각이 없는 서원은 단과대학에 비유된다. 누각은 세우고 싶다고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강당에서 공부에 전념하던 유생들이 머리를 식힐겸 누각을 올랐다고 한다.
“묘우와 강당, 누각이 모두 훼철 되고 당장 기거 할 수 없어지자 1917년 활원재를 지어 임시 강당겸 서원으로 강당이 복원되기 전까지 사용했다. 묘우도 없어져 단소를 만들어 향사를 모셨다”며 이를 설단향사라 한다고 회상했다. 탁청루에는 중창기문과 함께 원래의 기문이 있었다. 원래 서원의 현판들은 양동마을 유물전시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한편, 동강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하정에 향사를 모시고 있다.
-경절공 선생의 학문을 널리 알려 주었으면
선생의 15대이자 16세손인 손무익(62) 후손은 “올해 세계문화유산재단에서 29억이 나왔다. 그 비용으로 서원 주위 정화사업을 할 계획이다. 주차장을 만들고 신도비각을 옮길 것이다”고 했다.
원래 이 서원은 서원 앞의 철길까지 포함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서원을 없애려고 서원을 가로질러 철도를 건설하려 했다. 이에 후손 손진원 선생이 철도청을 찾아가 사정사정해서 겨우 서원을 비켜나가도록 철길을 건설할 수 있었다”고 한다. 원래 누각 자리가 지금의 철길이 난 자리에 있었는데 부득이하게 철길이 나는 바람에 지금의 자리인 뒤쪽으로 물려 복원 했던 것이다.
서원주위의 어울리지 않게 위치한 하수종말처리장에 대해 묻자 손무익 후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 전이어서 제재를 할 수 없었다”며 누각 앞 복잡한 풍경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2011년 경상북도 문화원 연합회에서 선생에 대해서 학술세미나를 가졌다. 여기서 시사하듯, 우리가 바라는 것은 경절공 선생의 학문을 널리 알려 주었으면 하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다”며 후손들의 바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