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설날 밤 꺼져가는 등불 앞에 홀로 앉았으니/봄이 오는 소리가 먼 고목에서 들리네/ 덧없는 세월은 육십 하고도 육년/ 한 해가 바뀌는데 어인 일로 못 가는가//
이 시는 조선후기 경주가 낳은 걸출한 인물인 덕봉德峰 이진택(李鎭宅, 1738∼1805)선생이 귀양지에서 한 해를 보내며 소회를 적은 시다. 불국사 가는 길에 있는 덕봉정사德峯精舍는 역사적 가치를 지니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해 이번기획의 취지에 최적한 곳이었다.
숨어있는 보물을 발굴하는 기쁨을 덕봉정사가 선사해준 것이다. 경주가 배출한 조선조 ‘덕봉선생’의 발견과 훌륭한 문화유산으로서의 덕봉정사가 그것이다. 정자로 들어가는 작은 평대문의 기와에는 이끼와 와송이 무심히 자라고 있어 인적 없이 고즈넉한 덕봉정사의 운치에 세월의 무상함을 더했다.
또한 덕봉정 연못의 수면위로는 유난히 눈부신 겨울햇살이 매끄럽게 빛나고 과묵한 정자는 과객들의 눈을 호사하게 한다. 오직 의리와 명분으로써 국가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소신 정책을 펼친 덕봉선생 정신의 향기로.
-덕봉정사는
경주시 마동에 있는 덕봉정사는 1995년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13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덕봉 이진택 선생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을 양성하던 작은 초당을 후일 덕봉의 증손인 이우영이 확장, 중창한 것이다.
이우영은 1905년(고종 42)에 증조부의 유촉이 서려 있는 마동에 조용히 은거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덕봉정사를 건립하고 덕봉을 추모했다.
중창한지는 올해로 110여년이 되는 셈이다. 지금은 경주이씨 소정덕봉공파 문중이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다.
이 정자는 자연경관을 고려하여 ‘ㄴ’자 형태로 짓고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인 박공지붕과 아래 절반은 네모꼴로 된 지붕인 ‘팔작지붕’을 얹었다. 덕봉정사는 목재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폐사찰의 건축자재를 활용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건축물의 기둥을 받쳐주는 초석인 연화대나 대부분의 목재가 그렇다.
지금의 덕봉정사德峯精舍 바로 뒤쪽에는 덕봉의 작은 초당이 있었다고 구전되어 온다. 선생이 소박하게 독서도 하고 쉬는 공간이었다고 전한다.
정자 앞쪽에는 시원스레 호방한 연못이 있고 그 안에 갖가지 초목들이 무성한 원형의 섬이 있어 조경이 뛰어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연못은 당시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연못을 갖춘 정자들이 바깥경관을 고려하지 않는데 비해 이곳은 주변의 경관을 고려해 건물도 ‘ㄴ’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정자의 기둥뿌리와 초석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보머리며 계자각난간이며 추녀며 도리들은 정교하고 세심하게 잘 다듬고 조각한 목재의 고색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준다. 그러면서도 전체 덕봉정의 골격은 남성적이다.
-덕봉선생, 다산 정약용과 함께 실학과 개혁으로 국가재건에 전력 쏟아
선생은 부친의 명으로 명경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한다. 정조 4년(1780), 식년 문과에 합격하면서 승문원 부정자, 성균관전적, 예조정랑, 사헌부지평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게 된다.
또 정조의 특명으로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다. 선생이 문과에 급제하고 출사한 시기는 당파 싸움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정조의 신임을 받으면서도 벼슬이 사헌부 장령에 머무른 것은 정치적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당파간의 갈등속에서 개혁적이고 실학적인 그의 주장이 기득권을 가진 노론계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던 것이리라.
덕봉은 당시 정조가 펼친 탕평정책을 절대적으로 지지한 인물로 당파간 어느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덕봉은 오직 의리와 명분으로써 국가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소신 정책을 펼침으로써 사노비혁파에 이어 공노비해방을 보게 되었다.
특히 다산 정약용과 2년 동안 사헌부에 같이 근무하면서 실학과 개혁으로 국가재건에 전력을 쏟았다. 덕봉의 관직생활은 청렴과 악습개혁으로 일관했다.
1799년까지 관직에 있다가 정조대왕이 승하한 후에는 정약용을 몰래 도왔다는 이유로 함경도 지방의 외딴 산골 마을인 삼수갑산三水甲山에 2년 동안 유배된다. 그 죄목은 대략 실학자의 입장을 두둔하고 정약용 선생의 동생 정약전에 편의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덕봉 선생의 7대손인 이상필李相弼씨는 “당신께선 믿지 않았지만 천주교에 대한 이해도 상당부분 하고 계셨던 것 같다. 또 그분들과 교류를 하면서 여러 가지 편의도 제공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죄목들 같다”고 한다.
2년 후 유배에서 풀려나 그 이듬해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선생의 생애는 오직 의리로 점철된 삶이었다.
-원뜻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전격적인 개방 검토
이상필씨는 “연못 주변으로 나 있는 콘크리트 도로는 지금은 변형이 된 모습이다. 원래는 소나무가 울창하게 드리워져 아취가 매우 넘쳤다. 어릴적 그 소나무에 올라가서 다이빙하고 자맥질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1905년 확장하면서 원래의 초당은 관리채로 사용하다가 헐은 지가 불과 20여 년 전이라고 한다.
“내 기억속에도 그 집은 살아있다. 보존했어야 하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의 관리채에 자손들이 언제든지 와서 별장처럼 쉬어 갈 수 있도록 개방을 하려고 한다. 후손들을 비롯해 누구라도 이 고택을 다녀 갈수 있도록 하고싶다. 덕봉정사의 관리측면이나 선생의 홍보 차원에서도 그렇다. 불국사 아래여서 접근성도 좋은 편이다”
지금도 경주시에서 기본적으로 문화재 지킴이가 와서 관리해주고 있지만 단순한 관리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고 원뜻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전격적인 개방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씨는 “우리의 생활과 동떨어지지 않는 방향의 보존이 되어야 한다. 이로써 덕봉선생을 알리고 새로운 부분을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고 덧붙인다.
-3000여 점의 고문서와 1000여 권의 고서를 경주 동국대에 기증, 국학의 귀중한 자료로
1999년, 덕봉의 종손 소호蘇瑚 이상걸씨는 3000여 점의 고문서와 1000여 권의 고서를 경주 동국대에 기증, 소호문고로 보존되어 국학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덕봉선생의 7대손이자 소호의 종제인 이상필씨는 고문서정리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으면서 덕봉선생문집해제 등을 써서 국학계승에 이바지하고 있다. 그 결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고문서집성 제62권’, 동국대 경주도서관 ‘소정문고목록’등이 간행돼 있다.
다산과의 서간문도 동국대에 기증했다. 덕봉과 다산이 주고 받은 서신들과 다른 문서들이 다수 보관되어 오다가 1900년경 사저의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고 나머지는 불탄 흔적인 채로 보관되고 있다. 이는 앞으로 발굴해서 밝혀야 할 과제이다.
동국대학교에 기증을 한 것은 덕봉 선생의 일대기와 방대한 자료들을 토대로 학술적으로 조명 해달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상필씨는 “선생은 보수적인 지역에 살았지만 실학적이고 선진적인 사상을 가진 분으로 분명히 재조명 되어야 할텐데...,”하며 안타까워한다.
“다른 일기는 남아있는데 비해 귀양살이 당시의 일기가 없다. 기호 지방의 사상을 여기서 거론하기가 예민했던 당시의 문제로 보이며 없앴던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점이 애석하다. 선생의 사상을 조명하는데 큰 도움이 됐을텐데 그렇지 못하다”
“노비를 해방하자고 당색에 관계치 않고 주장했던 앞선 분이었다. 호구 조사시 노비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당신이 과거 급제를 하면서 노비들이 줄었다는 기록이 있다. 관직에 있으면서 부리던 노비들이 오히려 줄었다는 것은 노비 해방의 선두주자였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한다”며 우리 후손들은 이런 사실들을 규명을 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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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기사의 자료 일부를 인용, 이상필 저, 소호문고목록 ‘덕봉선생문집’중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