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신 감탄사를 남발할 수 밖에 없는 정자였다. 경주에 이렇게도 독특하고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니! 지헌止軒 이철명李哲明 선생을 기리는 귀래정은 강동면 다산2리에 위치하며 창건한지 260여 년 되는 조선시대의 정자다. 육각 형태의 평면구성과 독특한 조원造園구성의 귀래정 곳곳에서 발견되는 선조들의 지혜와 철학, 미학적 완성도는 진중하지 못하고 범상한 우리를 숙연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두둥실 구름위에 떠 있는 듯한 정자를 거닐라치면, 정갈한 싯구가 저절로 읊어 질 것만 같다. 그 당시의 틀을 깨는 형식의 귀래정을 설계하고 건축한 이를 예술가로 추앙하는데 한치의 망설임이 없다. 하루 종일 맑은 향기를 토하건만 난초 자신은 그것이 향기로운 것인지도 모르듯이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끌어내는 은은함이 귀래정에서 풍겨 나왔기 때문이다. 설화雪花본뜬 6각형 평면형태 하고 있어 육화정이라 불려 귀래정은 조선시대인 1755년(영조 31) 지헌 선생이 별세하자 그의 8, 9대후손인 여강이씨 천서川西문중에서 육화정이라는 가숙(집안에서 경영하는 글방)을 이 곳에 창건하고 자제들을 가르쳤다. ‘귀래정기’에 의하면 ‘귀래정의 본래 명칭은 육화정六花亭 또는 육각정六角亭으로서 정자의 규모가 넓지 않으면서 앞이 통활하고 헌사스럽지 않으면서 그윽하다. 여섯 모서리가 되도록 집을 짓게 된 것은 설창산을 마주 대하여 있어 그 산세가 설화雪花, 즉 눈의 입자가 육각인 것을 연상해 6각형의 평면형태를 하고 있어 육화정이라는 편액을 붙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 후 1938년에 그를 추앙하기 위해 지헌의 문집인 지헌선생문집止軒先生文集을 간행하고,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귀향부歸鄕賦’를 지은 것에 근거, 선생을 기리기 위해 ‘귀래정’이라 개칭했다. 1991년 경상북도민속자료 제94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헌止軒 이철명李哲明 선생은 이철명(1477~1523) 선생의 자는 지지知之, 호는 지헌止軒, 본관은 여주이며, 경주부북 천상촌에서 태어났다. 1495(연산군 1년)에 진사시에 급제했고 10년 뒤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해 병례조좌랑, 예조정랑을 거쳐 경주훈도, 홍문관 검교를 역임했다. 1519년 기묘사화가 발발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은거하며 이 곳에서 노모를 봉양하며 말년을 보냈다. 선생은 기묘사화 당시 여러번 상소를 올렸으나 1520년 귀향부를 짓고 돌아오고 2년 후 별세한다. 이 귀향부는 기묘사화로 사람들이 화를 당한 것을 개탄해 낙향을 결심한 뒤에 선생이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모방해 지은 것으로 극변하는 조정의 앞날을 걱정하며 괴로운 심정을 읊은 것이라 전하고 있다. 정자와 포사의 출입문 분리시켜 귀래정의 독자성 강조 귀래정의 배치는 정방형의 대지에 전면에 정자를 배치하고 그 후면에는 정자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항을 보조하며 지원하는 포사(관리사동)를 배치하고 있다. 외부에서 정자로 접근하는 일각대문을 설치했고, 정자와 포사는 담장으로 구분해 각각 분명한 영역을 이루고 있다. 한편, 정자와 포사의 출입문을 분리시켜 귀래정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육각형 건물에는 온돌을 두는 경우가 드문데 귀래정은 앞뒤로 나눠 앞은 마루로 하고 뒤는 온돌로 했다. 각 방에는 침구를 넣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 각 방의 문살 창호도 육각형으로서 이것도 드문 경우라고. 천장은 서까래가 보이는 연등천장과 빗천장과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다. 정자이면서 강학의 기능을 갖는 경주지역 정자 유형의 특성 잘 나타나 있어 귀래정은 특히 조경 구성이 특이해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정원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 되고 있다. 배치의 특성으로는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북두칠성모양의 연당이 눈길을 끄는데 연당의 면이 7개다. 일반적으로 전통조경에서 연못의 모양은 네모지거나 원형의 형상이 보편적이지만 이곳은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이다. 이 연못은 정자의 전면과 좌측에 걸쳐서 위치하고 있으며 다리를 건너면 정자의 전면에 접근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편, 정자와 이어주는 다리는 오작교로 비유하며 정자 전면의 좌우에는 계수나무를 상징한다는 괴석이 당시 그대로 위치하고 있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소의 혀 모양 익공형상은 일반적인 건물에서 나타나는 형식을 벗어나고 있다. 익공의 방향이 밖으로 향하고 있는데 비해 귀래정은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최영기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원장이자 건축학박사는 -歸來亭과 三槐亭의 건축특성-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의미에서 자기자신의 세계를 관조하는 형상이 되는 상당히 고차원적인 공간처리 기법’이라고 했다. 이것으로도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 하면서 조용하게 은거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최 박사는 또 ‘육각형 형상의 정자는 매우 희귀한 평면으로 일반적으로 사각형, 팔각형의 단일 건물로 된 정자일 경우 누마루로만 이루어지고 방을 들이지 않는 것이 보편적이나 귀래정은 단일평면이면서도 방을 들이고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러한 유형은 별장의 성격이 강하며 정자이면서 강학의 기능을 갖는 경주지역 정자 유형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귀래정의 기둥은 원형과 방형으로 하나씩 섞여 있었는데 모서리진 각진곳에는 원형기둥을 세우는 심미안과 지혜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옛 조상들이 얼마나 신중하고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헌 선생의 후손인 15대손 이진동(75), 14대손 이원봉(72)어르신은 “문화재 지정이후 담장을 새로 만들고 연당의 석축을 바꿨는데 예전 담장이 이렇게 높지 않았다” 고 하면서 “우리가 어릴때를 기억해보면 담장이 낮아서 정자의 안이 잘 보였다. 또 담장에는 ‘봉창(담장 속 담구멍)’이 있어서 공기가 순회하도록 했던 것 같다”고 했다. 또 정자의 규모에 비해 대문이 커 보인다 싶었더니 “어르신이 겨우 몸을 숙여 들어 올 정도로 작지만 옹골찬 문이었는데 대문 역시 보수하면서 다소 크게 만들어 버린감이 있다”고 두 어르신은 전했다. 정자의 난간, 보수한 지금 모습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섬세해 귀래정은 1755년 창건이후의 모습이 거의 그대로다. 가숙으로 창건할 당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상량문에 의하면 자손들이 십시일반해서 지은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두 어르신은 “정자의 난간은 예전에는 굽이치는 듯한 구름문양으로서 지금의 모습보다는 훨씬 더 화려하고 섬세했다. 난간을 보수 할 당시는 귀래정이 문화재지정 이전이어서 문중에서 자비로 보수했기 때문에 단순하게 처리했다”면서 “난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난해 보수한 정자로 연결되는 다리도 원형을 상실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본래 이 다리는 중간부분이 약간 높은 나무로 된 완만한 무지개형 다리모양이었다. 또 다리의 옆에는 높이가 나지막한 난간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화강석으로 단순하게 디자인한 지금의 다리에서는 예전의 고아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음력1월 20일 정초문례(연시총회), 후손들 정자에 모여 20여년 전까지 정자를 관리하고 심부름을 해주는 관리인이 살고 있었다고. 지헌 선생의 후손이 정자에 모이는 정초문례(연시총회)는 음력1월 20일로 이날은 각 지역의 후손들이 모인다고 했다. 최근 귀래정의 가치와 건축미를 인정받아 조심스레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 되면 귀래정으로부터 반경 500미터까지 인근주민이 각종 제재를 받는다는 의견이 많아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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