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가정觀稼亭은 강동면 양동마을에 있는 조선시대의 주택으로 중종조 명신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선생이 1514년 건립한 고택이다. 내년이면 관가정의 건립으로부터 500년이 되는 유서깊은 건축물이기도 하다. 관가정은 특이하게 대문이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어 조선중기의 남부 지방 주택의 연구 자료가 되고 있으며 1966년 보물 제442호로 지정되었다. 관가정 사랑채의 마루에서 내려다보면 양동마을과 들판이 탁 트이게 보여 넓은 경관을 접할 수 있다. 또한 안강평야는 우재 선생의 ‘곡식을 심어 자라는 기쁨을 바라보는 것처럼 자손과 후진을 양성하겠다’는 ‘관가觀稼’의 의미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정경이었다. 격식을 갖춰 간결하게 지어 우수한 건축미가 빼어난 관가정을 찾았다. 관가정, ‘곡식을 심어 자라는 기쁨을 바라보는 것처럼 자손과 후진을 양성하겠다’ 관가정은 우재 선생이 중종조 대사간(사간원의 최고 수장)으로 재직할때 잘못된 인사에 대한 시정을 위해 송 질 등의 사직을 청하는 수 차례 상소를 올렸으나 그 뜻이 받아 들여지지 않자 대사간을 사임하고 1513년 낙향해 이듬해인 1514년 ‘관가정’이라 현액하고 짓는다. 관가觀稼의 의미는 ‘오직 자연을 벗삼아 곡식을 심어 자라는 기쁨을 바라보는 것처럼 자손과 후진을 양성하겠다’는 뜻으로 창건한 유서깊은 건물이다. 한편, 관가정을 지은 6개월 후 중종은 다시 선생을 조정으로 불러 춘추관, 예문관, 상서원장, 직제학 등 여러 벼슬을 새로 부여한다. 이 고택은 양동마을 서향받이 언덕에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으로 자리잡고 앞쪽 좌 우로 날개가 돌출된 형태다. 동북쪽에 사당을 배치하고 담장으로 양쪽 측면과 뒷면을 둘러막아 주택의 앞쪽을 탁 트이게 해 낮은 지대의 마을경관을 바라보게 했다. 그러나 1981년의 보수로 인해 전면에 담장을 쌓고 일각대문을 내어 경치가 많이 가려져 버렸다. 조선중기 남부지방 주택 연구의 귀중한 자료 관가정 전체의 배치는 중문을 중앙에 두고, 서쪽에 사랑채, 동쪽과 북쪽에 안채를 두고 있다. 사랑채는 남자 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마을 입구의 높은 자리에 위치해 마루는 앞면이 트여있는 구조로 사랑채의 건축 형식이 돋보인다. 사랑채는 방 2칸과 대청 2칸으로, 대청은 누마루로 되어 있다. 사랑채의 대청의 밑 부분만 기단을 낮추고 기둥을 세워 결과적으로 누마루가 있는 정자 건물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대들보 위와 천장 사이에 아무런 벽체를 만들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며, 사랑방 앞과 사랑대청 주변에는 계자난간을 돌렸다. 안채는 네모 기둥을 사용했고 사랑의 누마루는 둥근 기둥을 세우고 누마루에 길게 난간을 둘러 정자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안채 부엌 출입문 위에는 살대들을 비스듬히 꽂아 환기가 잘 이루어지게 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안채와 사랑채가 한 지붕으로 연결되고, 서로 모이는 부분에는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중문 동쪽에는 한 칸의 온돌방, 두 칸의 부엌, 한 칸짜리 방 두 개를 두었고, 부엌 북쪽에 연달아 2칸 크기의 작은 대청과 2칸 크기의 안방이 있으며 다시 꺾여 6칸 크기의 큰 대청을 두고, 그 서쪽에 2칸 크기의 건넌방을 두었다. 한편, 건넌방에서 남쪽으로 꺾인 곳에 2칸 크기의 광을 두고, 그 앞에 한 칸짜리 마루를 두어 사랑채의 사랑방과 연결시키고 있다. 경관이 뛰어난 입지조건을 최대한 이용해 정자 기능을 갖도록 꾸민 사랑채의 건축 형식이 돋보이고 안채의 공간 구성이 이채롭다. 양민공 손소 선생 모시고 있는 국불천위 사당인 양좌영각良佐影閣 관가정의 북편에는 우재 선생의 부친인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선생을 모시고 있는 국불천위 사당인 양좌영각이 있다. 영당은 손소 선생을 봉사하고 나라에서 내사한 영정을 함께 모시던 곳인데 지금은 영정만 모신다. 사당은 따로 둘러막은 담장 속에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전면에 반칸의 퇴退를 달아낸 모양으로 된 일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한편, 손소 선생의 향사는 음력 5월5일이다. 생사당 복원, 건립하기 위해 노력 우재 선생의 15대 손인 손태익(75) 어르신은 “선생은 상주목사 시절 누에를 치고 농사를 장려한다. 당시 상주에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이가 많자 선생은 사재를 털어 강동, 안강, 김해평야의 곡식을 구해 상주민들을 구휼했다”고 전했다. 이에 선정을 베푼 선생에 대한 선정비와 함께 의성군 단밀면(현재 의성군)들이 세운 사당으로 생사당(生祠堂, 오늘날의 상주 속수서원)을 건립했으나 임진왜란때 불타 버렸다고 했다. “이에 후손들이 그 당시의 생사당(감사나 수령의 공적을 백성들이 고맙게 여겨 그 사람 생시에 그를 위하고자 모시던 사당)을 복원, 건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선생은 청백리면서 사재로 선정을 베푼 예가 많았는데 당시 상주 사람들이 선생을 존경하고 사모해서 건립한 생사당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은 3년째 지금도 진행중에 있다. 이를 복원하면 전국적으로 후손들에게 사표가 될 것이다”면서 이 생사당이 건립되면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예가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손태익 어르신은 또 “선생은 돌아가신 이후에도 추서(생전에 큰 공을 세워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덕망을 갖춘 사람에게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주는 것)나 증직이 없었다. 그것은 워낙 직언을 해서인 거 같다”며 안타까워 했다. 한편, 손태익 어르신은 “우재 선생을 향사하고 있는 동강서원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서원을 없애려고 서원을 가로질러 철도를 건설하려 했다. 이에 후손인 손진원씨가 주선하고 전 문중후손들이 총동원 되어서 결사적으로 항쟁했다. 이로써 철로의 설계를 바꿀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문중의 중요 행사 지금도 관가정에서 의논하기도 해 안채 대청마루 앞 ‘객거암’이란 현액은 서울에 있던 선생의 당시 집의 이름이다. 객거암은 경상도 선비들의 아지트로 당시, 청백리들이 많이 다녀갔다고 한다. ‘객거암’은 조 순 전 부총리의 글씨로도 유명하다. 손태익 어르신은 “문중의 중요 행사를 논의하거나 결정해야 하는 일이 있을때는 지금도 관가정에서 의논한다. 지난 14일은 위덕대학교에서 관례계례 행사를 관가정에서 치뤘다”고 했다. 관가정 앞마당의 향나무와 관가정으로 올라오는 어귀의 노거수 은행나무는 우재 선생이 관가정을 지으면서 기념으로 식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가정을 자문해주신 손태익 선생은 우재 선생의 15대 손으로 문중 일을 한지는 수 십년 이며 현재 경주손씨 문사협찬위원회 위원장이며 우재선생 속수생사당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다.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을 역임하고 강동농협조합장과 농협중앙회 대의원을 역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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