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書(사서와 삼경을 아울러 이르는 말)는 도를 전한 조종朝宗이고 수신제가의 큰 근본이니 학자는 잠시도 이를 떠나서 아니된다’
이는 최치덕 선생이 일찍이 문인에게 훈계했다고 전하는 말이다. 보문단지의 인근 손곡동(연정마을) 귀미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종오정 일원從吾亭 一圓’은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자희옹自喜翁 최치덕崔致德 선생이 만년에 정자를 짓고 많은 학자를 배출했던 곳이다.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들은 종오정을 호위하듯 감싸고 있었고 평삼문인 율수문을 들어서면 귀산서사龜山書社가, 서사의 왼쪽에는 함초롬한 종오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종오정 뒤로는 귀산서사보다 1년 뒤인 1747년 건립되었다는 묘우인 진덕묘進德廟가 있었다. 종오정 일원 입구에는 수령 420여년의 아름드리 향나무가 초하의 햇살아래 오늘도 당당했다. 이 향나무는 정자의 보호수로 지정 되어 있다고 했는데 흔치 않은 수령의 ‘인물좋은’ 노거수였다.
종오정 일원은 1997년 문화재 관리국에서 투자해 옛 형태를 살려 보수해 정비 되었다고 한다. 취재 당일이었던 지난 7일, 대구에서 찾았다는 방문객들이 종오정의 고아한 아취를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종오정 전체는 3개 건물군과 풍광이 수려한 앞쪽의 연못으로 구성
종오정 일원은 손곡동(연정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사 일원으로 1992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자희옹 최치덕이 만년에 정자를 짓고 많은 학자를 배출했던 곳으로, 앞뜰에는 석조·석등 대좌 등이 남아 있었다.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고자 따라온 제자들이 글을 배우고 학문을 닦기 위해 종오정과 귀산서사를 지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종오정 일원이다. 종오정의 전체는 3개 건물군과 풍광이 수려한 앞쪽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왼쪽에 본채인 귀산서사가, 오른쪽에는 사당을 나란히 배치했다. 1999년에는 종오정 일원의 입구에 향당의 공의로 신도비를 세웠다.
조선시대 영조때 학자인 최치덕, 70여명의 제자 배출
최치덕 선생은 숙종 25년(1699)에 경주 황남리에서 태어나 호는 자희옹自喜翁, 시호는 문효文孝로 선생의 선조는 경주 사람이며 신라 문창후 최치원 선생이 그 원조다. 선생은 효성이 지극해 영조 21년(1745) 부친의 상에 3년을 여묘하고 평생을 시묘하기 위해 묘 오른쪽에 일성재日省齋를 짓고 이곳에서 거처했다.
자희옹 선생의 9대손인 최춘도(75) 어르신은 “선생은 ‘효자의 마음에 종신토록 부모를 추모하는 것인데 하필 3년만 여묘하겠는가’고 하며 일성재에 머무셨다.
일성재는 원래 동서로 있었다고 하는데 제자들이 숙식을 하던 곳”이었다고 했다. “당시의 건물을 헐고 10여년 전 남쪽에 지금의 일성재를 다시 지었다”고 설명했다.
선생은 영조 46년(1770) 72세로 타계하기까지 진사 9명외 70여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문하생 가운데 등과해 벼슬에 오른 사람이 10여명이었고 또한 학문 연구에 몰두해 『역대시도통인』, 『심경집』, 『박의정선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선생의 사후 3년 후에는 이러한 업적이 조정에 알려져 호조참판의 벼슬에 봉해졌다.
종오정, 스스로를 쫓고(從吾) 관조의 세계로 몰입하는 선비의 정신세계 추구
종오정은 귀산서사보다 1년 뒤인 1747년 건립되었다. 연꽃을 구경하기 위해 연못가에 지어 놓은 정자인 종오정은 제자들이 선생을 받들기 의해 조성되었으며 ‘요凹’자 형의 연당이다. 요凹자형으로 운치있게 축조되어있는 것은 이를 바라보며 경치를 즐기는 것만이 아니라 속세를 벗어나 스스로를 쫓고(從吾) 관조의 세계로 몰입하고자 하는 선비의 정신세계를 추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종오정은 앞면 4칸·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에 양쪽에 가적지붕을 달아 위에서 보면 지붕 평면이 工자가 되는 것이 특이한 정자다.
대청 2칸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을 꾸민 중앙협실형이다. 종오정 앞면 좌우와 연못의 주위에는 측백나무를 비롯한여러 종류의 나무가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져 조화롭게 심어져 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원의 유적을 잘 이루고 있기로 유명하다. 이는 ‘인간의 자연화, 자연의 인간화’로서 자연에 동화시킨 것이라고 한다. 이 유적들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라고.
자희옹 선생의 10대손인 최규철(59)씨는 “종오정의 좌우에 심었다는 수령 250년의 측백나무 2그루는 그 기록과 수령이 일치하고 있다. 후대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오죽, 팽나무, 왕버들, 살구나무, 배롱나무는 조화롭게 심어져 있다. 측백나무가 원래 좌우로 2그루 였는데 태풍 매미로 한 그루가 넘어져 새로 한 그루를 식재했다”고 전하며 “연꽃이 피면 장관”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종오정의 서재는 ‘지간헌’, 동재는 ‘무송와’이다. 마루에는 이계 홍양호가 편액을 쓰고 기문을 지은 현판이 남아있다. 종오정 건립이후 이때부터 선생에게 배우려는 이가 더욱 늘어났다”고 했다.
종오정은 전면에 둥근기둥을 사용했고 기단과 주초에는 탑재를 주로 사용했다. 기둥의 머리부분에는 장식을 하지 않은 무익공 집이다.
진덕묘進德廟, 향사 지낸 지 65년째
최춘도 어르신은 “1954년 제자들이 묘우인 진덕묘를 세워 위패를 봉안했다. 묘우인 진덕묘는 향사를 지낸 지가 65년 정도다.
진덕묘는 지붕 및 단청등의 보수를 하고 칠을 다시 했다”고 했다. 사당의 정문은 솟을삼문으로 문짝에 태극무늬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일년에 한번씩 향사를 모시고 있는데 음력 9월 중정에 정丁자가 든 날로서 그날은 자희옹 선생의 문중과 경주 전역의 향중에서 참가한다. 현재는 향제를 지낼때 일성재에서 음식을 하고 보관한다고 했다.
귀산서사龜山書社, 최근까지도 강학의 기능 해
귀산서사는 1746년에 건립, 원래는 모고암 일명 손곡서당이라 했으나 1928년 귀산서사로 개칭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선생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강당으로 쓰였던 것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대청을 중심으로 한 중앙부는 앞뒤로 맞배지붕을 씌우고, 여기에 잇대어 좌우 측면에 다시 맞배지붕을 이은 독특한 팔작집을 이루고 있다.
지금의 귀산서사는 원형을 그대로 두고 보수를 했다. 그 모습이 검박하고 소박하기 이를데 없다. 서사는 나지막한 기단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넣은 후 기둥을 세웠다. 대청 2칸을 우물마루로 하고 양측에 온돌방을 뒀다. 3량가의 가구로서 대공의 모습이 특이하다.
최규철씨는 “조부인 최영락 할아버지는 집안의 ‘아재’들과 마을의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나도 조부에게 한자와 한문을 배웠다. 조부가 돌아가시고는 다른 지방에서 ‘선생’을 초빙해 귀산서사에서 글을 가르쳤다”며 최근까지도 귀산서사가 강학의 기능을 한 것을 강조했다.
자희옹 선생의 글들, 공들여 번역해 다가오는 8월에 출간
종오정 일원은 지금은 신라문화원에서 고택 체험스테이의 일환으로 운영되고 있다. 외국인들도 자주 찾는 명소가 된것이다. 연꽃이 피는 시즌이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하는데 주로 이들은 서사와 정자에 머문다고. 최춘도 어르신과 최철규씨는 “자희옹 선생의 글들인 문집이 판본으로 전해 왔는데 이것을 번역하고 공들여 해석해서 다가오는 8월에 출간될 예정이다”고 전했다.
친절하고 자세하게 자문을 주신 두 분, 자희옹 선생의 9대손인 최춘도 어르신과 자희옹 선생의 10대손인 최규철씨께 깊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