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의 상처를 보듬고 새로운 공동체 문화를 잉태 할 수 있는 인문학적 자산이 풍부하게 녹아있는 천혜의 자연 환경 속 ‘만화방창萬化方暢’하고 있는 양동마을은 봄이 만개하고 있었다. 절정을 지난 자목련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는 경산서당은 유서깊은 선조들의 삶과 정신이 묻어있는 양반마을(역사마을)인 양동의 ‘물봉고개’에 위치한다. 안강평야의 넓은 벌판과 경주에서 흘러들어 마을 옆을 흐르는 기계천(안락천),형산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곳이다. 박제화되어 유물로만 전하는 곳이 아니라 유교문화가 여전히 현실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곳이 바로 양동마을이다. 경산서당 역시 관광자원으로서의 기능에 그치지 않고 생활속 유교의 문화마당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었다. 5월1일, 석체례 향사를 앞두고 있는 경산서당은 고졸하기 이를데 없었다. 경산서당은 조선후기의 서당으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의 장손이자 시대의 사표인 무첨당無 堂 이의윤(李宜潤, 1564∼1597)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서당이다. 조화롭고 즐겁게 그리고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삶을 영위하는 지침과 전통적 가치를 반영해 오늘의 실천 덕목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경산서당을 찾았다. 무첨당無 堂 이의윤李宜潤선생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장손이며, 수암 이응인의 장자이다. 1564년(명종 19)∼1597년(선조 30). 본관은 여주. 자는 수연 然, 호는 무첨당無 堂. 선생은 뛰어나게 총명하고 단아하며 조용하고 욕심이 없었다. 예절을 숭상해 나들이할 때에 반드시 사당에 고하였고 항상 아침 일찍 배알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으며, 선조를 제사하는 예절은 그 선조를 따랐다. 일찍이 정구(鄭逑: 1543∼1620)의 문인이 되어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독서와 효행을 독실히 행하다가 34세에 요절한다. 효도하고 우애하며 지조를 굳게 지키면서도 다른이와 화합했다. 사림에서는 선생을 추도해 사원을 세웠고 저술로는 ‘무첨당선생문집’이 있다. 경산서당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경산서당은 1838년(헌종4), 지금의 강동면 오금리 일대로 추정되는 ‘낙산’에 창건했다. 이후 1857년(철종 8) 안계리로 옮겨 세웠고 1870년(고종 7)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린 것을 1918년 재건하였다. 이후 1967년, 포항제철 공업용수댐인 안계댐 공사로 인해 안계리가 수몰지역으로 정해지고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다. 이건 당시, 목재나 기왓장, 서까래, 기둥까지 그대로 가져와서 지었으며 관리사동도 그대로 옮겼다고 전한다. 심지어 관리사동 정원의 나무까지 옮겼다고. 경산서당 각 현판의 의미는 ‘경산慶山’은 시경의 ‘저 경산에 오르니 소나무와 잣나무가 곧고 곧다’ 에서 유래한다. 백세토록 옮겨지지 않을 묘우를 만들 재목을 취한 산이 경산이니 오랜 세월동안 기림을 말한다. ‘이선당二善堂’의 ‘이선’은 중용에서 인용한 것으로 ‘효자는 부모의 뜻을 잘 잇고 사람의 일을 잘 준행한다’ 에 나오는 두 선 자를 의미한다. 이는 효에 관한 실천적 의무에 충실했던 무첨당 공의 행적을 밝힌 것이다. ‘보인재輔仁齋’는 강당 동방 문의 현판으로 벗이 서로 선을 요구하면 덕이 날로 나아가 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심경재尋敬齋’는 강당 서방 문의 현판으로 배우는 자는 오롯하여 흔들리지 않아야 학문에 매진 할 수 있기에 이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경산서당 동재의 ‘학진재學眞齋’는 배우는 이는 반드시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다. ‘양지재兩止齋’는 도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자세를 말하며 배우는 자는 반드시 죽음이후에야 그만 두어야 함을 이른다고 했다. ‘윤암 장학회’에서 후손들에게 장학금을 지급 경산서당의 묘우는 훼철된 이후 복설하지 않았다. 경산서당은 강당인 이선당二善堂과 동재, 삼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강당은 정면 5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며 동재는 정면 3칸·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이선당은 정면 5칸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이며 양쪽 온돌방 1칸씩을 두고 있다. 양쪽 방(보인재輔仁齋, 심경재尋敬齋)은 ‘선생’들의 숙소였다. 지금은 향사시 보인재에 초 ,아, 종 헌관이 거하며 성손들이 보좌한다. 심경재에는 대축, 집례 등 타 성씨의 손님들이 유한다고 한다. 이 강당에서는 지금도 녹색농촌마을이라는 체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사군자를 가르치기도 하고 사자소학과 충효 사상도 가르친다고 한다. 한편, 유생들의 기숙사로는 동재만을 두고 있으며 동재는 앞면 3칸에 양쪽 온돌방을 두고 있으며 맞배 지붕이다.그리고 이 강당에서는 무첨당의 문중에서 일년에 한번 무첨당 어른의 성손들이 선생의 다른 호를 따서 만든 ‘윤암 장학회’에서 장학금을 지급하는 행사를 치르고 있다. 이 시기에 맞추어 후손들은 서당에서 매년 정기 총회를 열고 있다. 경산서당 왼쪽에는 관리사가 있다. 관리사는 안채와 전사청, 곳간채의 3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맞배지붕이다. 관리사의 안채는 앞면 5칸의 맞배지붕으로 비교적 큰 건물이다. 서당의 대문은 단정한 맞배지붕의 삼문이다. 156년전의 ‘경산서당 입향시집사분정기’, 당시의 홀기 최초 공개 경산서당을 처음 지어서 입향할때의 ‘경산서당 입향시집사분정기’라는 고문서 그대로를 취재 당일 볼 수 있었다. 그 당시의 홀기 또한 볼 수 있는, ‘영광’스런 순간이었다. ‘경산서당 입향시집사분정기’에는 경산서당 첫 향사를 모실때 모든 행사를 주관하는 도집례, 집례를 위시해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을 밝힘은 물론 경산서당은 사당이 없으므로 당일 신위를 만들었던 제위판을 기록했다. 또 신위를 받아서 받들어 모시는 봉위판, 축祝 읽는 사람, 요즘의 사회자격으로서 식순을 적은 홀기를 들고 향사를 진행한 찬자贊者, 초헌관을 보필하고 도와주는 알자謁者, 아헌, 종헌을 보필하는 찬인贊引 등 그날의 모든 행사에 관해 각 분야별로 관리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계동 무첨당파 회장은 “특히, 이 문서중에서 ‘학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들은 무첨당 선생의 학문을 배우러 온, 연륜이 많은 제자들로서 후손들이 그들을 우대하는 의미”이며 “‘이 분들이 가장 귀한 손님’이라고 전해듣고 있다”고 설명했다. 무첨당 선생 후손들의 배려로 이 귀한 문서를 처음 공개해 직접 볼 수 있는 기쁨은 각별했다. 경산서당 첫 향사를 지낸 것은 1857년 당시 초헌관이었던 이정수 선생을 필두로 경산서당의 첫 향사를 지낸 것은 1857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56년전이었던 것. 경산서당 건립당시부터 지금까지의 기록이, 즉 경산서당의 모든 것이 ‘고항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고항록에는 경산서당을 착공하기 위한 자본을 경주 혹은 도내 향중에서 부조를 내서 지었다는 기록들이 자세하고도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계동 회장은 “서당을 짓기전에 경북도내 여러 문중에 통문을 보낸다. 의성빙계서원, 청송 송악서원, 영덕과 대구, 안동 하회와 영해 권씨, 수원백씨 등의 각처에서 부조를 보내왔다. 이렇게 준비를 해서 준공을 하고 첫 향사를 모신 것이다”고 전했다. 또 ‘경산서당 수계안(부조계)’에는 그날 참관했던, 축하하러 왔던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최근의 이주덕 전 향교전교의 오늘날의 기록까지 적혀 있었다. 이는 지금의 방명록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자문을 맡아주신 이계동 무첨당파 회장님과 바쁘신 가운데 도움주신 문산 이병환 선생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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