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힘으로 말없이 웅변…탐욕의 우매함에서 벗어나다 지난 23일 찾은, 강동면 왕신리에 있는 운곡서원雲谷書院은 연 3일째 내린 겨울비에 젖어 아취가 넘쳤다. 운곡서원의 반월대에 올라보니 운무가 드리워진 서원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서원의 각 건축물은 ‘口’자 모양으로 의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전국 서원을 가봐도 이런 서원이 없다’고 하는 이 서원은 탑산으로 둘러싸인 지형과 경관이 빼어나기로 유명하다. 운곡서원을 둘러 보면서 탐욕을 부리던 우매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군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고 남의 악함을 이뤄주지 않는다’는 논어의 한 구절이 떠 올랐다. 더불어 살아가는 타자에 대한 배려와 이해에 대해 생각해보는 넉넉함을 서원 곳곳에 배어있는 정신의 힘으로 말없이 웅변하고 있었다. 운곡서원의 오늘이 있기까지 운곡서원은 안동 권씨 시조이자 고려개국공신 태사공 권행權幸 선생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1784년(정조 8년)에 지방유림들의 뜻을 모아 이 지역에 ‘추원사追遠祠’를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태사공을 경주에 모신 것은 본래 신라 종성김씨 ‘김행’이었는데 ‘권행’으로 고려 태조에게 사성賜姓을 받아 그 충의가 신라에 대한 마음이었으므로 경주 향인들의 인준에 전적인 지지를 얻은 것이다. 종중의 중의가 모아진 것이었다. 이후 동쪽으로는 단종의 이모부인 죽림공 권산해權山海와 서쪽으로는 귀봉공 권덕린權德麟을 더해 세 선현을 모시며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3년 이곳에 설단設壇을 해 태사권선생, 죽림권공, 귀봉권공에 대한 향례를 올렸다. 1930년 유허지에서 향사를 지내오다가 1976년 향의에 의해 ‘운곡서원’으로 개편해 일본거류 후손들의 성금과 전국 후손들의 성금으로 완전 중건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권혁근(76) 운곡서원관리위원장은 “묘우나 강당을 지을때는 기본적인 서원의 예가 있어 그것을 토대로 복원하지요. 기본적인 골격에 어르신들의 구증을 바탕으로 중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며 1976년 운곡서원으로 중건복원할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정자 ‘유연정’, 기적의 은행나무 ‘압각수’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인 경덕사景德祠, 신문神門, 5칸의 중정당中正堂, 각 1칸의 동무와 서무,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외삼문外三門으로 이뤄져 있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손되지 않은 6칸의 유연정悠然亭이 있다. 묘우(신위를 모신 사당)인 경덕사에는 권행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동무에는 권산해, 서무에는 권덕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중정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으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서재와 유연정은 유생들이 수학하며 거처하던 곳이다. 사당인 경덕사 옆에는 태사권공 신도비가 있고 외삼문인 견심문 앞에 서원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반월대가 있다. 유연정은 동편 계곡 ‘용추대’ 위에 태사공과 죽림공, 귀봉공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순조 11년(1811)에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자연 폭포수가 정자 앞으로 흐르고 있으며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간직한 것으로 1998년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345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이 정자는 운곡서원의 건축물 중에서 훼철 되지 않은 건축물이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여덟 팔 자 모양의 지붕을 얹었다. 정자에 오르니 계곡을 따라 무심히 흐르는 물소리에 더욱 명료해지고 명철해졌을 유생들의 체취를 맡는 듯 했다. 서원 경내 좌측에는 옛 모습 그대로인 ‘관리사’ 동이 따로 있는데 이 건축물도 훼철되지 않은 예전 그대로였다. 이 관리사의 규모만으로도 훼철 되기전의 옛 서원의 규모와 위상이 짐작될 정도였다. 현재 관리사에는 두 명의 관리인이 거주 하고 있으며 서원을 관리한다고 했다. 또 운곡서원에는 신목神木 한 그루가 있다. 아름드리나무 밑둥에 풍성한 가지를 하늘로 뻗어 올린 잎이 오리발처럼 생겼다 하여 압각수鴨脚樹라고도 하는 수령 330년의 은행나무다. 이 은행나무는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 등이 처형되자 죽었다. 그러나 이들이 복권되면서 200여 년 후 되살아난 기적을 일으킨 금성단(사적 제491호)의 압각수 가지를 꺾어 한 달여 후에 이곳에 심었는데도 그 가지에서 움이 돋아 또 한 번의 신비함을 보여 지금껏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고 전했다. 향유사가 ‘충’하면 초헌관인 원장이 ‘돌’ 하고 대답한다 이 서원에서는 연중 한 차례 춘향春享을 지낸다. 3월(초정初丁, 첫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제관들은 4~50명이 모인다고. 권 위원장은 “경주 향인들 중 각 성씨 대표들, 유림으로서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올 수 있습니다. 타 성씨도 많이 참석합니다. 경주 여러 문중의 인준을 받아 이 서원을 지었기 때문에 향중사람들이 참석하는 향중서원입니다”고 설명한다. 제수 장만에 대해 묻자 “향유사는 타 성씨의 사람이 한 명 있고 우리 권씨 문중 사람으로 문유사가 한 명이 있어서 이 문중 유사가 집안 사람들을 모셔와 향례를 치룹니다”고 한다. 안동 권씨 시조를 모시고 있는 이곳에 전국의 안동권씨 문중 사람들이 참배하러 오며 다른 성씨들도 방문해 참배 하기도 한다. 그럴때마다 권용호(문유사, 65)가 서원을 안내해준다. 권씨 문중출신의 문유사의 임기는 1년이다. 문유사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아침마다 분향을 한다. 한편, 향례시 ‘감생監牲’을 한다. 감생이란 향례 하루 전날 제수로 쓰여질 돼지의 상태를 살펴보는 과정을 일컫는다. 향유사가 제관들 앞으로 땅을 울리면서 네 모퉁이를 다니고 이 과정을 세 번 반복한다. 손을 씻어 돼지를 쓰다듬고는 다시 손을 씻고 읍을 하면서 ‘충’하면 초헌관인 원장이 ‘돌’ 이라고 한다. 이것을 세 번 외치면 건강하고 살이 찐 돼지가 제수로서 합격점을 받는다고 한다. 또 모든 제물은 익히지 않은 날 것으로 준비한다고. “그저 할아버지 소所에서 일한다는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합니다” 권 위원장은 “저희들은 개인이 출혈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할아버지 소所에서 일한다는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문중에 걱정 끼치지 않고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합니다. 문중의 뜻도 잘 모아집니다”고 해 운영위원장으로 힘드는 점에 대한 질문을 한 기자를 머쓱하게 했다. 또 “우리는 영리 목적의 어떤 관광자원화도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는 현재의 형편에 맞추어 조경을 좀 더 보완하는 정도의 계획을 가지고 있지요. 서원의 이미지 훼손이나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우려하는 차원입니다”며 서원의 관광 자원화에 대한 입장을 피력했다. 한편 올 한해 문유사를 맡은 권영호씨(65)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아침 일찍 사당의 문을 열고 분향하러 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라는 말에 권 위원장이 “문유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학식도 뛰어나고 배우겠다는 의지도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문유사 권씨를 칭찬한다. ‘봉심 아뢰오’ 촬영을 위해 사당의 문을 열 즈음 예를 갖추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기자의 말에 ‘아녀자는 무방’하다고 했다. 위패 여는 것을 ‘개독’이라 하는데 이때 ‘봉심 아뢰오’라고 고한다. 이는 신주를 보는 것을 알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태사권공, 죽림공, 귀봉공 세 분의 위패를 개독하고 촬영을 할 수 있었다. 겨울비가 내린 쌀쌀한 날씨속에서 촬영과 인터뷰에 협조해주신 권혁근 운곡서원관리위원장과 권용호 문유사 두 분 어르신께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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