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고무신 선생과 함께 진주 개천예술제 백일장에 참석했던 것이다. K는 당시 학생이고 고무신 선생은 경주공고 교사로서 경주 시내 문예반 학생을 인솔하고 갔었다. 대다수의 백일장이 그렇듯이 지도교사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인솔 교사가 자기가 인솔하여 온 학생이 입선하기를 희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 가서는 지도할 시간과 기회가 없는 것이 보통이다. K학생이 참석한 개천예술제는 백일장에 참석한 학생들을 모두 교실에 모으고 감독교사까지 배치했는가 하면 교실에서 제목을 발표하여 백일장을 무슨 입학시험을 치르듯 엄하게 실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무신 선생은 학생을 지도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생각다 못한 그는 비상수단을 썼다. 그것은 발표된 제목을 보고 그 제목에 맞는 시를 써서 K학생에게 넘겨주는 일이다. 그러나 교실 안에서 백일장에 참가한 학생에게 넘겨주는 일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무신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보드라운 종이에다 시를 적어 가늘게 말아서 자기 만년필에 넣고 뚜껑을 닫아 K학생이 있는 교실로 가서 넘겨주게 되었다. 교실에서 열심히 그 제목에 따라 작품을 쓰고 있는 K학생을 큰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경주에서 온 아무개 학생_” K학생은 유리창 밖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고 있는 고무신 선생을 보고 깜짝 놀라 대답했다. 고무신 선생은 “야- 임마, 장가가는 놈이 XX두고 간다더니, 백일장에 가는 놈이 만년필을 잊어버리다니. 에키 놈”하면서 그 학생에게 만년필을 무사히 건네주었다. 만년필을 받아든 그 학생의 머리에서는 뭔가 잡혀오는 것이 있었다. 고무신 선생, 그러면 그렇지. 하고 만년필 뚜껑을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얇은 종이에 시를 적은 것이 꼬깃꼬깃 접혀져 있었다. 고무신 작품을 백일장에 제출하여 장원했다는 소문은 못 들었지만, 고무신 선생이 만년필 속에 자기가 지은 시를 넘겨준 사실은 고무신 본인의 입을 통해 익히 들었던 것이다. 언젠가 고무신 선생이 개천예술제에 가서 백일장 심사위원으로 추대되어 학생 작품을 심사하러 심사장에 나타났다. 어제 저녁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퍼마셨기 때문에 심사할 때 원고지의 글씨가 가물거려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원고를 보려고 해도 잠이 오고 피곤하여 원고지가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침 화장실 가는 길에 여관집 주인이 먹으려고 약탕기에 끓이고 있는 인삼탕을 봐 둔 것이 생각났다. 그는 그릇을 준비하여 주인의 눈치를 살펴가며 인삼이 끓고 있는 약탕기의 내용물을 몽땅 붓고 거기에다 물을 가득 부어 불 위에 도로 올려 두고 그것만 들고 나와서 심사장으로 왔다. 심사하고 있는 원고지 옆에 인삼 끓인 물을 놓고 조금씩 마시면서 심사를 했다. 그러니 눈이 빤하게 뜨이더라는 것이다. 당시 심사 위원으로 조지훈, 설창수, 이경순, 조진대, 그리고 고무신 선생 등, 여러 문인들이 있었다고 했다. 고무신 선생이 갑자기 무릎을 치며 장원 작품이 나왔다고 큰 소리 치는 바람에 좌중 심사위원들은 흥분하여 읽어보라고 했다. 고무신은 감정을 섞어 시 낭독을 했다. 워낙 낭독에 뛰어난 고무신인지라 그 소리만 듣고서도 심사하는 분들은 감탄을 했다. 그 작품이 경주 학생의 것임에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것도 모르는 조지훈 선생은 그것을 도로 받아서 감정을 넣어 다시 시 낭독을 하면서 무릎을 치곤 했다. 그 작품이 바로 그 해의 장원 작품이 되었던 것이다.글=정민호(시인. 동리목월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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