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수는 중고등학교 다닐 때 청마 유치환을 만나 그의 애제자(愛弟子)로 청마의 사랑을 받았다. 벌써 중학교 다닐 때부터 학생문단을 주름잡던 서영수이기 때문에 그의 시는 그때 이미 전국에 알려진 학생시인이었다. 그는 전국 백일장에 ‘안압지에서’란 시를 써서 ‘어린 왕처럼 거닐고 싶다’는 패기를 보이기도 했다. 서영수는 학교 다닐 때 청마의 문학수업을 받았다.
그래서 ‘별과 야학’이란 학생시집까지 낸 일이 있었으니 전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전국백일장에 나가기만하면 장원 아니면 차상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래서 한 번은 진주 개천예술제 전국백일장에 출전을 했는데, 그 당시 진주지방에 있는 고등학교 문예반 학생들은 이번에 경주의 서영수가 오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중대 관심사였다. 백일장 당일 고등학생들이 몰려와서 경주 서영수가 누구냐? 하고 묻는 바람에 순순히 따라 나갔다가 봉변까지 당한 일이 있었다. 그가 누군가하면 당시 진주고등학교 재학생으로 나중에 경주에 와서 사적관리소장을 하던 정재훈씨었다. 그도 그때는 문학의 꿈을 가지고 백일장에 참석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조지훈, 박목월, 서정주 이런 유명 시인까지 백일장 심사를 맡았기 때문에 서영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대학으로 진학할 때 청마 선생이 써 준 추천서 1장으로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지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전면장학생으로 졸업을 하기도 했다. 이영도 시조시인이 마산 부산이 생활 근거지였었는데, 잠시 서울로 가서 우거하고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 서영수는 서울에 대학을 다녔으니 청마 선생의 편지를 가지고 가서 이영도에게 배달부 역할을 단단히 했던 것이다. 청마는 거의 매일 편지를 쓴다고 했다. 그것도 이영도 여사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를 말이다.
그것을 열흘이나 스무날을 써 모아 한꺼번에 보낸다는 것이다. 마침 서영수가 서울서 방학을 맞아 내려왔다가 올라갈 때, 청마에게 인사를 드리러가니 모아 두었던 편지를 한꺼번에 쥐어주며 배달을 부탁하고 갖다 주라는 전갈이었다. 청마는 그만큼 서영수를 믿었기 때문이리라.
서영수 시인은 그것을 받아 서울로 올라가는 야간열차 안에서 거의 다 읽고 난 다음 그 중에서 몇 편을 슬쩍해도 알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 5일분 정도를 빼내고 갖다 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청마가 돌아가시고 이영도 시인은 청마에게 받은 편지를 모두 모아서 책으로 묶었으니 ‘사랑 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 청마 유족 측에서는 “본인이 죽고 무덤에 흙도 안 말랐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 하고 야단을 한 적이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서영수 시인도 일흔을 넘기고 그가 가지고 있는 청마의 러브레터도 세월 속에 묻히게 되었다. 서영수 시인은 가끔 청마의 편지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을 하는데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보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한 번도 그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있어도 안 보여주는 것인지, 없어져서 못 보여주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 꿈같은 일인 것이다.
-정민호/시인·동리목월문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