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티파니>다방에서 나와 거리로 걸었다. 김기문, 이채형, 고무신, 필자, 그 외 몇 사람이 더 있은 듯하다. 찾아간 곳이 <옥이집>이란 대포집이였다. 우리는 테이블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이채형은 막걸리 다섯 되를 한꺼번에 불러 놓고 고무신 선생에게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한복에 두루마기를 차려 입은 젊은 선비답게 왼 손으로 오른쪽 두루마기 소매를 잡고, 선 자세도 아니요 앉은 자세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무신의 빈 술잔에 술을 따른다.
그는 매우 정중했다. 좌중에 모두 막걸리 잔이 놓아지고 대화가 시작되었다. 주로 문학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채형이 문학 이론에 열을 올리며 음성이 높아가기 시작하니 고무신은 젊은 이채형의 하는 행동과 말씨가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는 요즈음 대학생들의 문학 이론과 서울 문단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중용(中庸)에 관한 한문 이론으로 넘어 갔다.
이것을 듣고 있던 고무신 선생이 갑자기 역정을 부리며 “젊은 친구가 뭐 말라죽은 게 문학이냐” 하고 꽥하고 소리를 질렀다.
“................”
술좌석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모두 입을 다문 것이다. 이 말에 기분이 나빠진 이채형은 “주모, 여기 큰 대포 사발 한 개 주이소” 하고 주인에게 고함을 치듯 말했다.
주인은 얼른 우동 사발처럼 생긴 큰 대접을 하나 가져 왔다. 이채형은 손수 주전자에 들어 있는 막걸리를 콸콸 소리가 나도록 따라서 연거푸 세 잔을 마신다. 넉 잔째 술을 따르고 주전자를 탁자 위에 쾅 소리가 나도록 힘차게 놓고는,
“어이, 선생님. 당신 시가 시요?”했다. 갑자기 폭군으로 돌변한 이체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무신은 어이가 없는 듯
“촌놈치곤 제법 똑똑 하군” 했다. 이 말을 들은 이채형은 “뭐요? 당신 시집, 응, 응, 습지(濕地)? 양지(陽地)? 그게 시집이요?”하고 이채형은 흥분하여 말까지 더듬으면서 패기 넘치는 젊은 문인답게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이채형은 넉 잔이나 마신 막걸리가 이제야 그 효력을 발생한 것이다. 이래서 술자리는 깨어지고 모두 흩어져 갔다. 그 길로 이채형은 모처럼 강동 단구에서 신라문화제 행사에 나온다고 한복까지 곱게 차려 입고 있다가 술자리에서 술 세례로 얼룩졌다.
그날 그 시간 이후의 이채형의 음주 편력은 알 바는 없지만 그날 저녁 백일장 심사장에 나타난 이채형의 모양은 말이 아니었다. 명주 바지와 저고리는 모두 찢어지고 게다가 술에 흠뻑 젖어 검은 두루마기는 흰 막걸리에 범벅이 되어 흰옷이 되었다. 옷고름은 죄다 떨어져 없어지고 신발도 한 짝이 없어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한바탕 태풍이 지나간 후와 같았다.
-정민호(시인·동리목월문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