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P고교 재학시절에 고무신 선생이 전근을 왔었다. 아침 조회 때 부임 인사차 조회대 위에 올라온 고무신 선생은 한 말로 가관이었다. 어젯밤 새도록 술을 마셨는지 얼굴은 부은 것 같기도 하고 검은 듯 붉은 듯 눈꺼풀은 좀처럼 떨어질 것 같지 않는 그런 표정이었다. 마치 잠자다가 뛰쳐나온 사람 같았다.
그러나 일단 단상에 올라서서 하는 부임 인사 하나는 요즈음 말로 끝내주었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웃다가 하나같이 감탄하며 그의 달변에 혀를 내돌린다. 청중을 휘어잡는 그의 말솜씨는 대단했었다.
그날 오후 넌닝 셔츠바람으로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굴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오늘 아침 부임 인사를 한 고무신 선생이었다.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혼자 운동장에서 공을 굴리고 있었다.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학생들을 붙잡고 같이 공을 차자고 으름장을 놓고 했었다. 그는 그만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는 예의나 체면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부임하여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말본’ 시간이 되어 처음으로 우리 교실에 고무신 선생이 수업하러 왔었다.
그는 분필 한 개와 출석부만 달랑 들고, 뛰다시피 하여 교실에 들어 와서는 들어오자 말자 유치환 선생의 ‘울릉도’를 소리 높여 낭송했다. 어느 친구가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구근 수근 “저 선생님이 시인선생 이란다” 하면서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날 한 시간 수업은 여러 가지 잡담으로 일관했었다.
최현배 선생의 추종자인 그는 최현배 문법에 대해 이야기했고 대학에 강의했던 이야기, 그리고 경남 진주에 삼인 시집(설창수, 조진대, 이경순) 출판 기념회에 참가했는데, 출판기념회 석상에서 “이번 3인 시집 저자가 설창수 조진대 한 사람은 누꼬” 하고 ‘조진대’ 라는 말에 액센트를 주어 발음하다가 설창수 선생한테 호되게 당했다는 이야기, 심지어는 음담패설까지 동원하여 한 시간 수업을 끝냈다.
-정민호(시인. 동리목월문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