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월백일장이 시작된 것이 1968년, 목월노래비 제막식을 한 그 해부터 실시했다. 처음에는 경주시내에 초등학교 문예지도 교사들의 모임인 <푸른편지회>에서 맡아 하다가 나중에 경주문인협회에서 주관 주최했다. 초등학교 교사들의 모임인 <푸른편지회>는 교사들의 전출 때문에 그 모임이 없어지고 경주문협에서 맡았던 것이다. 그 때에는 목월선생이 직접 경주에 오시고 행사에도 참석하여 백일장 심사까지 해주셨다. 참가범위도 초등학교로 한정했으나 참가학생 수는 무려 1000여명이 넘었다. 경주는 물론이요 대구, 울산, 포항, 영천, 심지어는 부산에서까지 행사에 참가 하러 왔었다. 1977년 제10회 목월백일장이 5월에 실시됐다. 당시 지부장은 이근식 선생이었는데 백일장을 앞두고 많은 회원들이 행사를 도와야 하는데 그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여의치 않았다. 그해에도 목월선생이 직접 오시기로 돼 있어서 손님 맞을 준비까지 지부장인 이근식선생 혼자서 다 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근식선생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다녀야만했다. 나는 그 때 경주문협의 어느 회원의 혼사문제가 있어 그 때문에 포항에 갔었고, 서영수 선생은 몸이 불편해서 방에 누워있는 형편이 되었다. 워낙 급한 지부장이 서영수선생에게 전화를 하니 아프다고 못나온다고 했다. 그럭저럭 지부장 혼자서 일을 처리하고 나니 마음이 몹시 좋지 않았었다. 당일이 되어 많은 회원들이 행사장에 나와서 백일장 행사를 끝내고 모두 <통술집>에 모여 앉았다. 십여 명의 회원들이 둘러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지부장은 목월선생의 가방을 들고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전송을 하러 갔었다. 회원들은 행사를 마친 홀가분한 마음으로 연거푸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 회원으로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대충 10여명, 서영수, 정민호, 손경호, 김홍주, 구석본, 박해수, 김기문, 그 외에 몇 사람이 더 있은 듯하다. 우리는 열심히 막걸리 주전자를 비우고 있는데 목월선생을 전송하고 지부장이 돌아왔다. 지부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모양이었다. 행사를 마쳤다고 앉아서 막걸리만 마시고 앉았구나 하는 인상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지부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식식거리며 “어느 놈은 집에 앉아 전화통만 들고 앉았고, 어느 놈은 중신한다고 포항에 가버리고 나 혼자 어쩌라고, 어찌 행사 하라고? 응?” 했다. 그냥 아무 말 말고 넘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갑자기 “지부장님! 어째서 화살이 갑자기 내한테로 날아옵니까? 예?” 했더니, 지부장은 갑자기 폭군으로 돌변하여 주전자를 들고 좌석에 집어 던졌다. 나 한데로 날아오는 주전자를 내가 피하는 바람에 곁에 앉아있던 구석본 시인이 정통으로 바로 맞아 막걸리 세례를 받고 말았다. 지부장은 “나는 인자 지부장 안한다. 너거들이 해라!” 하면서 서영수에게 한마디 하고는 나가버렸다. 우리는 그날 늦도록 술을 마시면서 우리가 너무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이근식 선생이 지부장은 안할 것 같고 부지부장인 서영수 선생이 지부장을 맡아야겠다. 하면서 그때부터 지부장이 서영수 선생으로 자연스럽게 돌아온 것이었다. -정민호(시인·동리목월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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