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경주문협에 처음으로 가입하니 성학원(소설가) 선생이 문협 지부장으로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까마득한 옛날 같이 기억된다. 회원이 모두 십여명, 경주시내 국어과 교사들이 주로 회원으로 있었다. 부지부장으로는 홍영기선생, 박주일, 이근식, 전문수, 김녹촌, 김영식, 정용원, 서영수, 김홍주, 정민호였고, 고무신 박종우 선생이나 김해석 선생은 이미 서울로 떠나고 없었다. 그 후에 김기문, 정진채, 이동태 회원 등이 더 들어왔었다. 초등학교 문예지도 교사도 있었고, 지금은 이름마저 잊어버린 중고등학교 국어교사도 더 있은 것 같다. 회의는 월례회로 자주 열었는데 주로 <통술집>에서였다. <통술집>은 지금 영국제과 부근으로 생각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통술집>에서는 ‘성동양조장’ 직매점으로 주로 막걸리를 팔았고, 안주는 꽁치 구이나 두부찌개나 비지찌개를 내 놓았다. 비지찌개는 그냥 얼마든지 퍼주는 서비스 안주였었다. 십여 명 남짓한 회원들이 한 방에 앉아서 월례회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시간은 주로 퇴근 후에 모이니까 거의 전원이 참석했다. 신라문화제 때는 외부 문인들을 초대했는데 외래문인을 초대할 때는 지부장, 부지부장, 사무국장 외에는 그 방에 들어가지 못했다. 손님이 있는 자리니까 회원들이 처신없이 손님과 동석하는 것을 꺼려 곧장 성학원 지부장이 회원의 이름을 거명하며 축출시켰다. 그래서 그 유명 인사를 초청한 방에는 을신 못하고 멀리 떨어져 밖에서 마시거나 아예 나타나지 못했다. 그러나 김영식 같은 사람은 그 방에 들어가서 온갖 재미있는 잡담이야기를 잘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차비’를 ‘신체운반비’ 로, ‘생전처음’ 이란 말을 ‘두상출모지호(頭上出毛之後)’란 말을 써서 자주 웃기곤 했었다. 한 번은 여름날 서천에 천렵 겸 야외 소풍을 떠났다. 그날 모인 문협 회원들이 칠팔 명, 냇가에 솥을 걸고 포장을 치고 냄비나 그릇을 갖다놓고 소위 본부석을 차렸다. 지부장은 상석에 앉아 나이 젊은 회원들을 불러 모두 냇물에 들어가서 그물 반도로 버들치, 미꾸라지를 잡아오게 하고 본부석에는 지부장과 나이 많은 회원들만 앉아서 우리 젊은 회원들을 고기 잡으러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이 고기 잡는 기술이 없어 한 마리도 못 잡고 왔다. 성학원 지부장은 “고기도 못잡는 놈들이 무슨 시를 잡느냐?” 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으나 고기잡이 기술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은 지부장이 냇물에 들어가서 고기를 잡아왔고 찌개까지도 성학원 지부장이 다 끓여서 소주를 그릇에 따라 마셨다. 성학원 선생은 출생이 강원도라 강원도 사람들은 소주를 소주잔에 따르지 않고 곧장 밥그릇에 따라 마신다고 하면서 그도 빈 그릇에다 그득하게 소주를 따라 마셨다. 그날 우리는 독한 소주에 술이 취하여 흐느적거리며 돌아왔다. -정민호(시인·동리목월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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