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식, 서영수, 정민호 세 사람이 서울에 간 일이 있었다. 이근식, 서영수 선생이 문단에 등단한 뒤였다. 우리는 목월 선생 자택으로 찾아갔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한양대학교 문리대 학장으로 있었고 ‘심상’지도 활발하게 발행되고 있을 때였다. 원효로에 들르니 목월 선생은 한양대 부속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우리는 목월 부인과 함께 병원에 병문을 가기로 했다. 그 때만 해도 보기 드문 자가용 승용차를 귀하게 여기던 70년대, 우리는 목월 선생의 차를 타고 병원에 들렀다. 목월은 병원 침대에 누워 우리를 맞으면서 그의 병이 별것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오늘 퇴원한다고 했다. 병원에 앉아 여러 가지 문학이야기, 문단이야기를 나누다가 심상사(心象社)로 갔었다. 목월 선생 내외는 집으로, 이근식 선생과 서영수는 또 다른 볼일로 가고, 나는 목월 선생이 미리 연락을 해 둔 ‘심상사’에 갔었다.
마침 이건청 시인이 있었다. 그는 그때 ‘심상’지 주간이었다. 그는 반갑게 나를 맞으면서 목월 선생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전화로 술과 안주를 시켜서 우리는 술을 마셨다. 마침 이채형이 서울에 와서 취직이 되어 있었다. 나는 곧 전화를 했다. 이건청, 이채형, 나, 세 사람은 엄청나게 술을 마셨다.
문예지 사무실에서 문인과 주간이 술을 마신다는 것은 그 당시 풍조로 보아 드물다고 채형은 말했다. 문인이 문예지 주간을 찾아 술을 사는 게 그 때의 풍조였었다. 그러나 이번은 그 반대였다. 우리는 그냥 종일 술대접을 받고 저녁 늦게까지 이채형과 함께 어디론가 갔었는데 지금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마셨다. 깨어보니 어느 여관에서 이채형과 자고 있었던 것밖에 더 기억할 수가 없었다. 채형이는 그때 서울의 첫 직장생활에서 어려울 때였다.
목월 선생은 1978년 3월 부활절이 가까운 어느 날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서 62세를 일기로 그는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