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신라문학대상’ 응모작품을 모아서 들고 김동리선생 댁을 찾은 것이 88년 가을이었다. 제1회 신라문학대상에 응모한 작품을 모아들고 심사를 의뢰하려고 찾아간 것이 동리선생 댁이었다.
미리 연락하여 김해석 황명, 원형갑 선생이 오시고 경주에서는 이근식, 서영수, 정민호가 동리선생 댁을 찾게 되었다. 미리 연락을 하여 댁이 강남 청담동 영동교 부근이란 것도 전화로 미리 알았으니 찾아가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김해석 선생과 함께 가지 못했지만, 그날 동리선생 댁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서울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도착한 것이 오후 3시쯤, 전화를 걸어 동리선생 댁을 확실히 알아서 ‘비 내리는 영동교’를 생각하며 찾아가니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동리선생 댁이 으리으리하게 크다고나할까? 대문 앞에 서니 문패가 붙었는데, 였다. 동리선생의 호적명이 ‘김창귀’라는 사실도 그날에야 알았다. 마당에 들어서니 잔디며, 화단의 화초며 넓은 뜰에는 가을꽃이 한창 피어있었다. 동리선생은 마당에 나오며 우리를 맞이했다. 건평이 지하 지상하여 99평이라 하니 가히 짐작이 갈만도 하다.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벌써 김해석 선생과 황명 선생, 원형갑 선생이 와 있었다. 그 때는 서영은이 동리선생 댁에 같이 와 있었다. 널찍한 방안에서는 이미 술상이 벌어져 있고, 둘러 앉아 정종을 마시고 있었다.
동리선생 댁은 항상 정종(청주)이 준비되어 있어 오는 손님마다 좋든 싫든 이 술을 마셔야했다. 60대 쯤 되어 보이는 식모가 대기해 있다가 술 주전자를 데워 나르고 있었다. 정종 잔이 몇 순배가 돌고 거나하게 되었을 무렵 MBC기자 둘과 여자 한사람이 나타났다.
그 여자는 소설을 쓴다는 여기자였다. 동리선생과는 매우 가까운 모양, 상냥하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둘러 앉아 술잔을 받아 마셨다. 시간이 깊어지니 모두가 취할 만큼 취한 것 같았다.
술이 취한 동리선생은 벽장문을 열고 청주병 하나를 꺼내서 손수 부엌으로 나가서 술을 덥히고 어디서 안주까지 다시 준비하여 나왔다. 술이 취한 동리선생은 노래를 부르면서 즐겼는데 그 노래는 무슨 노래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정종 주전자를 들고 서영은에게 술잔을 주며 억지로 술을 따르는 바람에 술이 철철 넘치는 광경을 보아 동리선생이 매우 취한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술에 취한 우리들은 그길로 나와서 어느 여관에서 자고는 아침 일찍 동리선생 댁으로 갔었다. 벌써 일어나시어 단정히 앉아 있었다. 아침식사까지 마치고 아침밥은 먹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먹었다고 대답하고 앉아 있으니 선생은 서재에 들어가시어 글씨를 쓰셨다. 한참 만에 작품 몇 장을 가지고 나오더니 하나씩을 주셨다.
‘開花如是’ ‘心外無法’ ‘蘭有香,菊有芳’ ‘淸風明月’ 이 그것이었다. 나는 아직 동리선생이 써주신 글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지금도 동리선생의 묵향이 베어나는 듯하다.
경주 황성공원에는 동리선생의 표징비가 있다. 이 비는 1997년에 한국문인협회가 SBS의 후원을 얻어 작고한 전국문인들의 연고지에 세운 것이다. 동리선생의 고향인 이곳 경주 황성공원에 이 표징비가 세워진 것이다. 이 비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동리東里 김시종金始鐘선생의 문학 동산」
이곳은 선생의 「무녀도巫女圖, 황토기黃土記, 등신불等身佛, 사반의 십자가 등, 가장 향토적이고 무속적인 한국 전통 정신에 접맥된 문학을 꽃피우기 위하여 일생을 바친 동리 김시종(1913~1995)선생이 젊은 시절 작품구상 을 위하여 소요하던 유서 깊은 문학 동산이다.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한국문인협회가 SBS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현대 문학 표징사업의 일환으로 이 글을 새긴다.
-1997년 11월 8일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황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