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을 하려고 찾아 간 것이 1960년 봄, 서울 미아리 고개를 넘은 것이 나의 운명이요, 동리선생과 만나게 된 첫 계기였었다. 나로 하여금 시인이 되게 한 것도 바로 동리선생과 그 대학이었다. 김동리 선생이 그 때 내가 입학하려는 창작과 과장으로 계셨다. 입학생이 모인 자리에서 동리선생께 처음으로 내가 인사를 올렸다. 면접과 함께 ‘산정山頂’이란 제목을 주며 글을 한편 써내라고 해서 간단히 적어냈더니 나를 장학생으로 뽑아주었다. 그것이 나와 동리선생과의 첫 인연이었다. 그해 봄, 첫 수업이 시작 되었다. 주로 소설 강의를 김동리로부터 받게 되었다. 동리선생에게 학점을 받기 위하여 몇 편의 소설을 쓰게 되었다. 이란 작품을 실기 시간에 발표했었는데, 내 소설을 남기수라는 친구가 낭독했고, 나중에 동리선생으로부터 평을 받게 되었다. 좋은 칭찬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 이 무난하고 구성이 쉽게 알 수 있는 구조로 쓰였다는 평을 받고 동리선생께 좋은 학점을 받은 것으로 기억된다. 동급생들 가운데는 벌써 문단에 등단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문단에 등단도 못하고 그길로 바로 군에 입대를 하고 말았다. 입대하는 날 광장에서 나는 박수일을 만났다. 그 후는 까마득히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 1979년 신라문화제 때였다. 서울서 김동리 선생과 서정주 선생을 초대문인으로 모시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소설가, 시인을 경주에 모신 것이다. 숙소를 천우여관으로 정하고 내일의 문학행사를 위하여 오늘의 전야제를 두 분의 선배 문인을 모시고 쪽샘 ‘향화정’에서 벌였던 것이다. 김동리 선생은 경주 출신의 작가로서 경주를 무대로 한 작품 무녀도, 화랑의 후예, 달, 바위, 까치소리 등 수많은 작품을 써서 소설가로서 최대의 영광을 누린 분으로 경주가 자랑하는 선배 문인이요, 서정주 선생은 시집 “신라초新羅抄”로서 신라정신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한국 문단의 태두로 추앙을 받는 시인이다. 이 두 분을 경주에 초대하여 오시게 된 것은 경주 문인들은 더없이 영광이었다. 그 날 쪽샘 향화정(당시 경주 쪽샘에 있던 이름 있는 요정임)에 모인 사람들은 십여 명 정도, 김동리, 서정주 선생을 비롯하여 경주문협회원 여러분이었다. 저녁 무렵부터 저녁밥 대신 술상 앞에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두 선배 문인을 모시고 경주의 후배 문인들은 그 동안의 여러 가지 안부를 물으면서 술을 마셨다. 그 때의 최고의 술은 백화수복이라는 정종 이였다. 박주일 선생은 좀 늦게 찾아 왔었다. 벌써 술에 젖어 있었다. 두 원로 문인에게 인사를 하는 과정부터 절반은 응석, 절반은 주정이 섞인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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