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월 선생의 내외는 행사 하루 전에 경주에 도착한다. 구, 경주관광호텔에 여장을 풀고 우리를 부른다. 연락을 받은 우리는(이근식, 정민호, 서영수, 김기문) 숙소로 찾아가 인사를 드리면 그날 저녁에는 꼭 술을 싸주었다.
경주의 몇몇 문인들은 내일 백일장 행사 준비 차로 ‘통술집’에 모였다. 의논을 마치고는 밤새도록 술을 마신다. 불국사에 가자는 누구의 제안이 있어서 술을 가득 싣고 택시를 몰아 불국사로 갔었다. 불국사 입구 가까운 도로 길섶에 술자리를 펴고 한창 마시고 있었는데 날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밤 세워 마신 것이다.
마침 목월 부부가 불국사 아침 산책 나오다가 우리를 보고 경악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밤새워 술을 마시고 사람을 못 알아 볼 정도가 되어 길바닥에 누워 있었다는 것이다. 목월 선생이 우리를 깨우는 바람에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왔다. 시내에 들어와서 다시 팔우정 해장국집에서 해장국 한 그릇씩을 먹고 목월백일장 행사에 참가했다. 목월 선생은 그때부터 경주 문인들의 술 실력을 인정해 주었다.
그날은 마침 비가 내렸다.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리는 통에 행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겨우 백일장 개막식을 끝내고 참가한 학생들이 흩어져 글을 쓰려는데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은 나무 밑으로 혹은 운동장 스탠드 밑으로 비를 피하여 글을 지었다. 보통 아침 10시부터 시작하여 12시쯤이면 작품을 거두고 점심을 먹는데 그날은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작품을 모아서 신라중학교 교실을 빌려 심사를 시작했다.
목월 선생은 처음부터 심사에 참여하여 끝까지 하나하나 살피면서 최고상을 뽑을 때는 다른 문인들과 합의하여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최고상은 목월상으로 초등학교 저학년·고학년, 중학교 각각 1명씩을 뽑았다. 고등부는 그후 목월 선생이 작고한 다음 박동규 교수에 의해 신설되었다. 시상식 때는 목월 선생이 직접 시상하고 수상 학생을 불러 하나하나 물으면서 당시 삼중당에서 발행한 목월 전집을 한 아름씩 상으로 주기도 했다.
70년대 초, 목월 선생이 살아 계실 때는 목월백일장 때마다 경주에 오셨다. 부부동반으로 같이 와서는 경주문인들을 격려했고, 목월 선생이 참가하는 이 행사는 더욱 관심을 가졌으며 전국의 문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서울에 신중신, 신규호, 유승우, 박동규(목월선생 타계한 뒤 몇 번 왔었다.) 황금찬, 윤강로, 박경용, 이건청, 이명수, 권택명, 대구의 김성도, 김동극, 신송민, 이재철, 도광의, 유상덕, 최정석, 신동집, 이태수, 서종택, 박상륜, 울산의 함홍근, 김성춘, 박종해, 포항의 손춘익, 그 외에도 많은 문인들이 왔었다.
그때 경주문협 회원들은 대회 준비를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당시 지부장인 홍영기 선생님과 전회원이 당일에 사용할 도시락이며, 막걸리를 ‘말통’으로 준비하느라 여염이 없었다. 그때는 도시락을 만들어 팔지 않는 시대라 회원 5명이 자기 집에서 도시락을 20개씩 만들어 오기로 했다. 당일에는 집에서 만들어온 도시락을 참석한 손님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