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문화제 한글백일장에 초대 인사로 동리 선생을 모셨다. 그러니 80년대 중반으로 기억된다. 아마 그 때가 서울로 올라가시고 공식적으로는 처음 경주에 오신 게 아닌가 생각된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는 자주 경주에 오시지 않았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오신 동리선생은 새롭고 신기하고 또 신비했는지 여느 때보다 신라문화제와 경주 여러 지역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았다.
가장행렬이며 문학행사며 신라문화제 행사장 뒤편에서 열리는 난장과 장터, 품바 공연 등,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회원들과 함께 엿장수 골목을 누비며 흥겨워하던 일, 포장을 둘러 친 국밥집에서 막걸리를 맛있게 드시던 일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가 술이 한잔 거나하게 취하니 ‘예들아! 난 70이 넘었는데 아직도 현역(?)이야’ 하시던 말이 뚜렷이 기억된다. 김기문 시인의 오토바이를 타고 문화제 군중 속을 누비며 다니던 일이 어제만 같았다. 그날 저녁은 늦게까지 행사에 다녔고 밤에 에 와서는 회원들과 같이 막걸리를 기울이던 생각이 난다. 신라문화제 한글백일장 날이었다. 아침 일찍 사무국에서는 나물왕릉에서 행사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이크를 준비하고 천막도 치고 각급학교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첨성대, 계림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들고 있었다. 백일장 행사를 시작해야하는데 동리선생을 모시러 가야했다. 나는 김기문의 오토바이를 타고 에 계시는 동리선생을 모시러 갔다. 천우여관에 가니 동리선생은 세수를 하고 있었다. 동리선생의 세수하는 과정이 매우 특이했다.
물을 세면기에 받아 놓고 얼굴을 담그다가 머리를 담그다가 하면서 오래도록 얼굴과 머리를 문지르는 것이 특이했다. 세수하는 데만 30여 분이 걸리고 거울 앞에서 닦고 문지르고 하는 것 역시 시간이 걸렸다. 시간은 아침 10시가 가까워 오는 데 동리선생이 가셔야 행사가 시작된다.
우리는 조급하여 발을 동동 구르는데 동리선생은 옷을 갈아입고 천천히 여관을 나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택시를 타고 현장에 가야하는데 행사 인파 때문에 택시를 잡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차를 탄다고 하더라도 거리를 빠져 나가는데 몇 시간이 걸릴지 문제였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동리선생을 김기문의 오토바이에 태워서 먼저 보냈다.
김기문의 오토바이에 올라탄 동리선생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 벌벌 떨면서 “얘, 나 이레도 대한민국 국보야, 조심해서 가자!”하면서 쩔쩔 매는 모양이 보지 않아도 머리에 선했다.
한글백일장 현장에 도착한 동리선생은 신기한 듯이 둘러보면서 우리에게 지시하셨다. 백일장 제목과 행사에 관한 내용을 말씀하시고는 바로 마이크 앞에 나서서는 대회사를 했다.
그 첫마디가「나, 오랜만에 경주에 왔는데.....」시작하여 좀 길게 대회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동리선생은 수월(水月)선생을 연락해서 데리고 오라고 했다. 수월(조각가)선생은 조각가로서 동리선생의 죽마고우일 뿐 아니라 친분관계가 두터운 사이였다.
두 분은 서로 만나면 꼭 막걸리를 마시며 함께 즐겼다. 그래서 백일장 행사를 시작해놓고는 수월과 지부장과 사무국장과 함께 감포 쪽으로 바람을 쐬러 가셨다.
거기서 바닷바람을 마시며 오랜만에 회와 막걸리를 즐기고 돌아오셨다. 동리선생이 서울로 돌아가시고 문학지에 ‘수학여행’이란 소설이 발표되었다. 경주로 수학여행 온 여고생들의 즐거운 모습과 경주의 역사적 배경의 아름다운 경주를 소설로 쓴 작품이었다. 이 작품이 나중에 영화화되어 상영된 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