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중반 쯤 되었을까? 한국문협에서 후원하고 경주시청이 주최하는 반공문학 강연회가 있었다. 경주문협이 주관하여 3일 전부터 포스터도 붙이고 경주시청 공보실 차를 동원하여 거리마다 돌아다니며 광고 방송도 했다. 한국문협에서는 김동리, 박목월을 연사로 초청하여 내려 보냈고, 박양균 시인도 함께 내려왔었다. 경주문협 회원 중에 학교에 근무하는 사람은 그 학교에 학생을 동원하라는 부탁도 있었다.
드디어 문학 강연회 날이 왔었다. 토요일 오후2시 문화고등학교 대강당에서 강연이 시작할 무렵이었다.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청중은 거의 없고 연사도 도착하여 문화고등학교 교무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와야 하는 청중이 거의 없고 맨 앞줄에 초등학교 조무래기만 오물오물하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청중이 적다고 안할 수도 없고 안 하자니 지금까지 시청과 연사들에게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드디어 시간이 되어 김동리 선생과 박목월 선생이 강연을 하려고 강당에 들어서니 조무래기 초등학생만 오글오글 앉아 있으니 동리선생이 어이없다는 듯이 연단에 섰다.
첫 발언이, “경주는 나의 고향인데 내 고향이 이렇게 황폐해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백 명 이내의 청중 앞에서 강연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하고는 경주문협 회원 들을 대단하게 나무라고는 “이왕 이까지 왔으니 그냥 갈수는 없고 내 자작시 한 수나 낭독하겠다” 하고 자작시 한수를 낭독했다.
달 밝은 하늘엔
나도 새가 되고 싶다
저 멀리 강물 위의
뿌연 안개 속으로 날아가고 싶다
슬픔은 언제나 마음속
깊은 골짝에 흐르고
꿈은 차라리 설운 가락
노래나 되어 돌아오는가
-김동리의 자작시
‘달밤’의 전반부
동리선생은 시한 수로 강연을 대신했다. 난 그 때까지 동리선생이 소설가로 알고 있었고, 시는 전연 쓰지 않는 걸로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물론 시로 출발하여 소설로 전향한 줄은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청중 앞에서 자작시를 낭송할 줄은 몰랐었다. 차라리 목월 같았으면 몰라도....하며 생각했다. 이 ‘달밤’은 경주와 상당한 관계가 있는 작품 같았으며 동리선생의 젊은 날의 서정이란 걸 느끼게 해준다.
그 때, 박목월 선생은 동리선생을 달래듯 은근히 강연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동리선생은 머리를 쩔레쩔레 흔들며 좌석에 들어와 앉는다. 목월선생 혼자서 주어진 시간을 위하여 강연을 시작했다. 우리는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끝까지 그 강연을 다 듣고 자리를 떴다. 지금 생각해도 낯이 뜨거워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대구에서도 최정석 교수가 왔고, 포항이나 타지방에서도 문인 몇 사람이 와 있었다. 그러니 경주문협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오늘의 반공문학 강연은 완전 실패로 끝을 냈다. 아마 그길로 연사 두 분은 서울로 올라가신 것인 지, 그 후의 기억은 거의 없다. 지금도 부끄러움만 남아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