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월의 부인 유익순 여사는 충청도 공주(公州) 분으로 목월과 만나게 된 동기와 사연이 있었다. 유 여사는 그의 형부가 경주 금융조합(농협의 전신)에 근무하고 있었던 때였다. 언니 집에 와있던 처녀와 금융조합 직원인 목월 사이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자주 오가고 하다가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 여사의 형부가 경주에서 좀 떨어진 기계 금융조합에 있을 때 목월은 경주에서 기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서 처녀를 만났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는 목월과 유 여사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기술하는 것이지만, 기계는 그 분들의 연고지라 오늘에 와서 당시를 회상할 수 있는 좋은 곳이기도 했다. 70년대 어느 날 우리는 목월 생가에 도착했다. 당시 초가삼간의 초라한 집이었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손세익 씨)이 살고 있었다. 초가지붕을 벗기고 스레트를 덮었으며 담을 블록으로 쌓았어도 형태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구조는 모두 개조하여 낯설게 되어 있었다. 고향집을 찾은 초로의 신사 목월은 그때의 감회를 못 잊는 듯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그때의 추억을 회상이라도 하는 듯 우리에게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며 들려주었다. 때마침 그 마을에 살고 있다는 목월의 어릴 때 친구 우 씨라는 사람이 찾아 왔었다. 서울서 온 친구를 만나려고 두루막의 앞섶과 동정 끝에 고운 때가 묻은 무명 두루마기를 차려 입고 머리에는 갓까지 쓴 모양이 촌로 그대로였다. 그는 목월의 손을 정답게 잡으며 “아이고 이게 누꼬. 영죄이(영종이) 아이가. 응?” 하고 순수 그대로 나누는 경상도식 인사였다. 목월은 “그래, 잘 있었나. 자주 못 와서 미안하다” 하니, 그는 “아니데이 니는 마 라디오에 자주 나오 데이. 그리고 읍내 텔레비전에도 자주 나온다 카데이. 그게 마 고향 오는 게 아이가” 했다. 함께 간 사진 기자는 열심히 사진만 찍어댔다. 우리는 그 집 방문 앞에 둘러서서 목월의 소년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마을 아이들이 몰려와서 서울서 온 시인의 얼굴을 연거푸 훑어보고 있었다. 살구정 들판 밭둑에서는 송아지들이 뛰어 놀고 초가을 고운 햇살이 목월이 입고 있는 코트자락에 자꾸 떨어지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어떤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목월은 공손히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말을 낮추고 목월은 공대를 했다. 아마 어머니의 친구인 듯 했다. 목월 어머니의 안부를 묻는 걸 보니. 목월은 지갑에서 오천 원 권(당시 최 고액권) 몇 장을 뽑아 할머니께 건네주었다. 그 할머니는 처음 보는 고액권에 놀란 듯이 한참 사양하다가 받았다. “마을 어른 분들, 막걸리라도.........” 했다. 우리는 그날 경주로 돌아와서 고궁다방에 들러 차 한 잔씩을 했다. 그리고 기계에 가기로 했다. 기계는 목월 내외가 젊은 시절 그곳에서 처음 만난 곳으로 그들에게는 잊지 못할 곳이었다. 목월 내외는 대뜸 “기계에 아직 서숲, 동숲이 있나?” 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저녁 무렵이 되어 우리 일행은 기계에 갔다. 이튿날이 기계 장날이었다. 오는 날이 장날인 샘이다. 문성, 고지, 성계, 지가, 화대에서 쇠달구지가 나오고 길 따라 하얗게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날 촬영은 아주 좋았다. ‘동숲’ 과 ‘서숲’ 길을 따라가는 흰옷 입은 사람들, 먼 산등을 사진에 담고 있었다. 나는 목월이 쓴 ‘기계杞溪 장날’이란 시가 생각났다. 보레이 보레이 자네, 사람 한 평생 이러쿵 살아도 저러쿵 살아도 시쿵둥 하구나. 누군 왜 살아, 사는가. 그렁저렁 그저 살믄 오늘 같은 기계장도 서고. 오늘같은 날은 지게목발 받쳐놓고 어슬어슬 산비알 바라보며 한잔술로 소회도 풀잖는가. 다 그게 기막히는 기라 그게 다 유정有情한기라. -박목월의 ‘기계杞溪 장날’의 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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