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 박목월, 모두 경주 출신의 문인으로서 우리나라 문단에 시와 소설의 두 산맥을 이루었다. 1950년대부터 신춘문예 심사위원, 문예지 추천위원으로 한국문단의 거장(巨匠) 자리를 지켜왔었다. 그들은 한국문단에 수십 년 동안 원로로서 추앙을 받았다.
70년대 와서 한국문단은 문협의 패권 다툼 때문에 몇 줄기 유파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한국문협 이사장으로 박종화 선생의 장기 집권이 끝나고 이어 김동리 선생, 서정주 선생 , 조연현 선생으로 내려오면서 한국문협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는 등 한국문단에는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70년대의 문단은 대가들의 싸움에서 시작하여 싸움으로 끝났다. 이런 와중에서 오직 목월은 ‘한국시인협회’만을 맡아 문협의 싸움에서 벗어났다는 정평을 듣고 있었다. 나중에 전해진 말이지만 영부인의 전기인 ‘육영수 여사’ 집필로 상당한 물의가 있었던 것으로 당시 문인들 사이에 여러 가지 뒷말들이 전해지고 있었다.
목월 선생의 평생 유업의 하나는 월간 ‘심상(心象)’지의 창간이었다. 문공부에 잡지 발간의 등록을 마치고 경주에 온 일이 있었다. 그때 마침 삼중당(三中堂)에서 목월 전집 발행의 예정으로 사진작가를 대동하고 경주에 촬영차로 내려 왔었다. 목월, 부인인 유익순 여사, 삼중당 기자, 세 사람이었다. 고궁다방에서 전화를 걸어 왔다. 즉시 다방으로 나가니 세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목월 선생은 시 전문지 ‘심상’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경주 문인들에게 지면을 주게 되어 기쁘다고 하면서 문공부 등록을 은근히 자랑삼아 말했다.
그때 서영수의 시 추천을 들먹였다. 마침 이근식 선생이 다방에 오셔서 목월 일행과 인사를 나누고 두 사람과 함께 추천하기로 약속을 했다. 현대문학과 현대시학을 놓고 이야기를 하다가 당시 목월과 친분관계가 있던 전봉건 시인을 생각하여 ‘현대시학’으로 결정되었다.
햇살이 따가운 초가을 우리 일행은 사진 촬영을 떠났다. 서울 손님 세 분과 이근식 선생, 나, 다섯이었다. 우선 목월 생가가 있는 모량으로 떠났다. 손경발 씨가 보내준 지프차에 다섯 사람이 터져 나갈 듯 타고 모량으로 향했다. 모량역 마을 도로 밑에 좁은 굴다리를 지나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차는 찾아가고 있었다. 멀찌감치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걸어서 갔다. 목월 부인은 목월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하염없이 들려주고 있었다.
목월 선생의 부친은 박준필 공으로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한시를 잘 짓고 일찍 신문명에 눈 떠 측량 기술을 배워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당시 국토 측량에 참여한 측량 기사였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목월의 출생지가 경남 고성으로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거라고 우리는 짐작했다.
유익순 여사가 목월에게 시집 온 곳이 오늘 우리가 찾아가는 목월 생가인 것이다. 같은 마을 아래윗집에 큰어머니와 목월 생모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목월이 대구 계성중학교에 다닐 때 그는 이 마을의 유일한 학생으로서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았다고 한다. 부인과 결혼해서 한때 이 마을에 와서 산 적이 있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