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경주에 있는 ‘동리목월문학관’ 관장을 맡으면서 그 소회가 남다름을 느끼고 있다. 내가 20살에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하여 처음 만난 교수가 김동리 선생님이셨다. 그 때 창작과 과장이면서 소설을 지도하셨다. 목월선생님은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우상처럼 생각하며 그의 시를 외고 다니던 때였었기 때문에 입학하자마자 목월선생을 찾았다. 드디어 목월선생을 만나 그의 신나는 강의를 듣는 것이 나에게는 유일한 즐거움이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 두 분을 아직도 있지 못하고 있다. 내가 66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었을 때도 목월선생과 조지훈선생이 심사를 하셨다. 그 때 내가 목월선생 댁에 인사차 들렸을 때, 그 반가워하는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아! 너가 정민호였구나!’ 하시는 그 굵고 다정한 음성이 내 가슴 속에 아직도 남아 있다. 동리선생은 소설 실기시간에, 내 습작소설 “합각”을 보시고 빙그레 웃으시던 그 때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변변찮은 내 소설에 학점을 주시던 그 은혜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80년대에 남들이 받기 어렵다는 “한국문학상” 을 주신 것은 오직 나만을 생각하신 은혜로움으로 뇌리에 그대로 각인되어 있다. 나는 20대, 동리목월선생은 그 때 40대였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두 분은 돌아가시고 나도 70대의 후반이 되어 ‘동리목월문학관’ 관장으로 취임 하고나니, 동리, 목월 선생님께서 나를 보고 “鄭君!” 하고 빙그레 웃으시는 것 같아서 눈시울이 뜨거워온다. 이번에 다행인지는 몰라도, 그 직계 제자인 내가 ‘동리목월문학관’ 관장을 맡고나니 자꾸 옛 생각이 나서 가슴이 울렁여오고 있다. 동리선생님, 목월 선생님. 아무리 불러보아도 아쉬움만 남는 지금, 나는 어떡해야합니까? 노을이 기우는 서산을 바라볼 때처럼 자꾸 감격이 앞서 오는 것을 선생님, 그것을 어떡해야합니까? 어제 목월선생님 생가에 다녀왔습니다. 예날 다정해 보이던 초가삼간 흔적은 사라져 없어지고 목월선생님의 동상만 말없이 서 있는 것을 바라보니 서산에 지는 노을과 함께 서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머잖아 동리선생의 생가도 복권되고 그 복원된 동리선생의 옛집을 바라보게 되면 그 때 역시 눈물겨운 옛 추억이 솟아날 것 같습니다. 동리선생님, 목월선생님, 늘 안녕히 계십시오. 지금도 하루가 지나가는 저녁 무렵입니다. -정민호 관장은 1966년 박목월, 조지훈, 송욱선생의 추천으로 思想界로 등단. 시집 『꿈의 경작』 외 16권, 시조집 『그리운 날의 연가』 외 다수, 시선집『깨 어서 자는 잠』 외 다수, 수필집 『시인과 잃어버린 팬티』등 다수 경주시문화상, 경상북도문화상, 한국문학상, PEN문학상, 한국예총예술대상, 창릉 문학상 등 수상 경주문인협회장, 한국예총경주지부장, 경북문인협회장 역임, 한국 문인협회 자문위원,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동리목월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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