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선생이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이 경주 ‘동부금융조합’이었다. 오늘날의 ‘농협’ 전신이었다. 1939년에 목월이 문장지에 정지용의 추천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 동시에 추천을 받은 세 사람이 바로 청록파 시인들이었다. 조지훈은 서울에 있으면서 문장에 등단을 하고 보니 경주의 박목월을 처음 알게 되었다. 서울에 있는 조지훈이 박목월을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조지훈은 경주에 있는 박목월에게 긴긴 사연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그 편지 속에서 ‘목월, 당신을 꼭 만나보고 싶다’ 는 내용의 편지였다. 이 긴 사연의 편지를 받은 목월은 불과 한 줄밖에 안 되는 답장을 썼다. ‘경주박물관은 지금 노오란 산수유 꽃이 한창입니다. 늘 외롭게 가서 보곤 하던 사느란 옥적을 마음속에 그리던 임과 볼 수 있는 감격을 지금부터 기다리겠습니다. 오실 때 미리 전보 주시압’이 짧은 글을 받고 나는 이내 전보를 쳤었다. 목월은 편지를 보내고 조지훈이 경주에 온다는 전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에 서울서 조지훈으로부터 전보가 날아왔다. 며칟날 몇 시에 경주 도착이라는 전보를 받고 목월은 그날 그 시간에 맞춰 경주역으로 나갔다. 서로 얼굴을 모르는 사이이므로 목월은 기다란 확대 끝에 이란 깃발을 달고 역 광장에 나가 서있기로 했다. 시간이 되어 조지훈은 역에 내려 목월의 얼굴을 상상하면서 역 구내로 나오니, 어느 한 사람이 광장에 서 있는데 깃발을 들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쉽게 만날 수가 있었다. 이런 이야기가 박목월의 ‘산도화山桃花’란 시집의 발문을 조지훈이 썼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경주의 문인들은 여기에 등장하는 나무를 잘 알고 있다. 70년이 지난 오늘에도 고목이 되어 ‘경주문화원’ 뜰에 서있다. 지금 ‘경주문화원’으로 쓰고 있는 이 건물은 본래 조선말까지 경주부윤의 동헌東軒자리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주군으로 행정구역이 바뀌면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사용하면서 이 지역 문화 유물유적을 보관하여 전시하던 것으로 소위 ‘경주박물관’이었다. 이때부터 이 경주박물관에는 샛노란 산수유 꽃이 이른 봄에 피어 새봄을 알리는 전령사 역할을 했던 것이다. 목월이 지훈에게 쓴 글 속에 이 산수유 꽃이 등장한다. 그 때는 샛노란 꽃이 피어 봄을 알렸을 뿐 아니라 시인들의 시집에도 등장하는 중요한 문화유적이 되었다. 지금 ‘경주문화원’ 뜰에 가 보면 산수유가 고목이 되어 가지를 옆으로 뻗고 언제 어느 때 뽑혀나갈지 모르는 운명에 놓여있다. ‘경주문화원’에서는 이 고목이 된 산수유 노목老木을 늦게나마 잘 보호하여 그 목숨이 다할 때까지 보존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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