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서천)변 차도 가에 북동쪽으로 잔디밭 산책길이 있다. 잘 가꾸어진 꼬불 길에 훤출한 나무들이 줄을 섰고 그 사이로 시민들이 아침 저녁 걷고, 달리곤 한다. 특히 이 지역은 우리나라 현대소설의 거장 김동리 선생의 생가 터가 있으며, 그가 유년시절 뛰놀던 마을로, 사람들은 이 길을 사랑하며, 걸을 때는 항상 그를 생각하게 된다. 더욱이 산책길 주변에는 선생의 생가 터와 문학 기념비, 작품 배경도등이 있어 더욱 그와 친근감을 갖게 한다.
▶김동리(金東里) 선생의 생가 터가 있는 길 이야기 전봇대에 매달린 동리선생 생가 안내표지를 따라가니, 어느 집 방범창 앞에 생가 터 해설판이 서있다. 그의 옛집은 없어지고 집터는 세 사람의 소유로 분할되어있다고 한다. 여기가 경주 성건동 284번지, 김동리 선생(1913-1995)생가가 있던 자리이다.
주변에 무속 인들이 많이 살던 곳으로 작품 「무녀도」의 동네 배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은 널찍한 도로들이 생겨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다. 김동리 선생은 1913.11.23 김임수(부)와 허임수(모)의 5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934년〜36년(3년사이) 조선일보(백로). 중앙일보 (화랑의 후예), 동아일보(산화)신춘 문예에 잇단 입선으로 문단에 화제가 되었으며, 그 후 대표작, 무녀도, 황토기, 등신불 등으로 한국문단에 부동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한국소설가협회 대표(79년), 예술원회장(81년), 한국문인협히 이사장(83년)을 역임하였으며 1995.6월에 돌아가셨다고 적혀있다.
▶김동리 선생의 문학 기념비 소개 산책길에는 2019년, 7월에 설치한 선생의 문학 기념비가 있다. 1.2단 기단위에 화강암으로 “김동리 선생문학 기념비(-고향을 사랑하신 문학인 동리선생-)”라고 적혀있다. 고향경주를 사랑했던 분으로 작품대부분이 경주나 신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등단 작품이 ‘사랑의 후예’이고, ‘기파랑’을 포함한 16편의 신라 역사 소설이며, 무녀도, 황토기, 바위 등에서 보듯, 경주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 역시 화랑의 후예로 자처하며, 경주인다운 가장 한국적인 작가였다. 따라서 이곳은 선생의 어린 시절의 애환이 깃던 곳으로 한국역사문화의 본원지이며, 한국문학의 종가라고 끝을 맺고 있다.
▶동리선생 작품에 나오는 경주지명과 주변 환경 이야기 그가 경주에서 출생,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기 때문에 경주일대가 그의 작품 배경으로 많이 등장한다. 대표작품인「무녀도」에는 그의 집이 있던 무당촌을 중심으로 건너다보이는 서천, 예기소 등이 배경으로 나온다. 모화의 굿판이 열리던 서천 백사장이며, 그녀가 망자(亡子)의 혼백을 건지기 위해 무열의 상태에서 춤을 추며 숨져가든 곳이 서천 예기소 강주변이다. 그가 어릴 때부터 무속촌 에서 신비스런 당집, 당제, 당나무 등을 보면서 민간 토속신앙 분위기에 싸여 자랐기 때문에 무속적인환경이 이 소설무대의 기본 울타리가 되었다고 본다.
이 소설은 식구들 간의 다른 종교로 인해 파국에 이르는 한 가족의 불행한 모습을 그린 것으로,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 민족의 기본적인 민속신앙의 정체성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의 작품 「달」속에서도 달이가 물에 빠져 죽는 곳이 형산강유역의 금당나루근처이며, 「역마」에서 두 주인공이 놀러가는 곳으로 칠불암이 나온다. 그의「황토기」에는 두 친구(억쇠와 득보)의 활동무대로 동 남산을 설정하고 있으며,「바위」「까치소리」에도 경주 부헝듬 마을, 장군교, 성건동입구 회나무 등이 등장한다.
봄이 오고 있다. 봄 따라 이 문학 비 길을 거닐며, 선생의 작품세계와 그의 삶을 알아보고, 그리고 봄꽃에 싸인 작품지역을 구경 하며는, 이 길이 의미 있는 인문학의 길로써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