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차레 발굴된 석장사터 경주 동국대 옆 석장리 마을을 지나 옥녀봉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면, 한참가서 석장사지(錫杖寺地) 팻말이 서있다. 대나무들이 둘러있고 석재파편, 와편들이 흩어져있다. 돌아서면 멀리 형산강 중기가 보인다. 동국대 박물관이 이 자리에서 두차례(1986년, 1992년) 발굴조사를 했다. 신라시대(7c~8c)산지가람으로 고려때 재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석장(錫杖)이라고 쓴 자기조각이 출토되어, 여기가 석장사 터라고 확인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지팡이가 집집마다 날아다니며 시주를 받아왔다는 석장사 석장사는 선덕여왕(632~647)때 양지(良志)라는 스님이 주거하던 절로 알려져있다. 근처 주민들은 이곳을 ‘절골’이라 부른다. 이절에 대한 내력은 전해오는 바가 없으나, 석장사라고 이름지어진 연유는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양지스님이 석장(지팡이) 머리에 포대 하나를 걸어놓으면, 이것이 저절로 날아 시주집을 찾아 다니며, 방울을 흔들어, 소리를 내었다. 집주인은 이 소리를 듣고 ‘아! 양지스님이 시주를 받으러 왔구나’하고 그 포대에 재에 쓸 비용을 넣어주었고, 이 집 저 집 다니다가 포대가 차면 날아서 다시 절로 되돌아오곤 했다. 신통한 도력을 지닌 스님을 암시해주는 듯하다. ‘양지(良志)란 무엇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난 공장(工匠)을 의미하며, 석장은 머리에 여섯 개의 방울이 달려 흔들면 소리가 나는 지팡이로, 스님이 탁발할 때 인기척을 내거나, 길을 다니면서 짐승을 쫓는데에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조각(공예), 서화, 음악 등에 다재다능한 양지스님 이야기 출신, 집안 내력 등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선덕 여왕때 석장사와 함께 행적이 들어난 도승이요, 예술가로서 불교관련 공예, 불상, 녹유전 등을 잘만든 기예만능의 스님으로 전해온다. 또 그림을 잘 그리고, 글씨를 잘써 ‘영묘사’와 ‘범림사’의 현찬을 썼다고 전하리만큼 서화에도 재주가 뛰어난 스님이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영묘사의 장륙삼존상과 천왕상, 사천왕사 탑 팔부신장 제작과, 그리고 절에 작은 전탑을 짖고, 그 안에 3000불을 만들어 봉안했다고도 한다. 특히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녹유사천왕상전은 이 스님의 최고 걸작이라고도 한다. 사천왕이 갑옷을 입고, 악귀를 발로 뭉게고 있는 모양인데, 짖눌린 악귀의 모습이 고통스럽지않고, 오히려 익살스럽게 보인다. 악귀를 응징하는 것 같아도, 부력으로 그를 감화시키려는 자비가 엿보일만치, 그의 넓은 도량과 읽살스런 해학을 느낄 수 있다.▶그가 지어 부른 노래 ‘풍요(공덕가)’의 이야기 삼국유사에 의거, 영묘사의 장륙삼존상을 조성할 때의 일이라고 한다. 곡식 2만3700석이나 되는 큰 비용을 시주받아, 삼존상을 만드는데, 성안의 남녀들이 흙을 나르며 노력봉사를 했다. 이 때 많은 사람이 즐거운 마음으로 능률적인 일을 하기 위해 양지 스님이 지어 불렀다고 하는 노래(향가)가 ‘풍요(風謠)’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왔구나 왔구나, 절로 모여 왔구나. 인생이란 고통스럽고 서러운 것. 그래서, 극락왕생하기위해, 절로 공덕 닦으러 왔구나”이다. 사람 한 평생의 고통, 한탄, 서러움과 푸념 등이 잘 나타나 있는 노래로 보인다. 신도가 사주대신 부역을 할 때, 부르는 노래인데, 죽어 좋은 세상에 가서 살 수 있도록 공덕 쌓기를 권장하는 공덕가로 전한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에만 해도 시골 여인들이 방아 품앗이를 하거나, 힘든일을 할 때,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양지스님 주거 절터에서 발견된 신라 보물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임신서기석(보물 1411호)’은 1934년 일제 강점기. 경주박물관 분관장이었던 ‘오사까 긴따로’씨가 석장터에서 발견한 작은 돌비석이다. 신라화랑 두 사람이 국가 충성과 학문연구에 매진하자는 약속의 글(74자)이 새겨셔 있다. 그리고 ‘신라인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얼굴무늬 수막새’ 또한, 일제 강점기 영묘사터에서 발견된 것(보물2010호)으로 전한다. 신라 여인이 살짝 웃는 모습을 조각한 와편인데, 여인의 미소가 너무 아름답고 은근해 그 조각 솜씨가 수련된 장인의 특출한 예술적 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연유로 해서 두 보물은 혹여 양지스님이 주석하던 석장사와 영묘사에 관련이 있든 이 스님의 작품 영향을 입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양지 스님의 이런 신묘한 조각 솜씨에 대해, 그가 젊은 시절, 인도여행을 했거나 중국 유학을 통해, 인도 불교문화(예술) 환경에 접했으리라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일연 스님도 삼국유사에서 “이런 재능은 작은 재주로만 밖으로 들어난 것이지, 그의 참실력은 뒤에 숨기고 있었다”고 극찬했듯이 양지스님은 탁월한 재능과 신출한 재주를 가지고, 행적없이 조용히 나타나, 불사, 불전 제작에만 불심 전력을 쏟았을 멋진 스님으로 생각이 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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