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경주 켐퍼스에서 형산강을 따라 안강으로 가는 지방도로(68번) 변에 현곡면 나원리(羅原里)가 있다. 신라시대 왕들의 안태를 묻었다는 안태봉(337.9미터) 아랫마을로, 형산강을 굽어보며 멀리 경주들판을 바라보고 있다. 옛날 배 (裵)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개척한 마을로 난원리(蘭原里)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현 이름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형산강 건너 외롭게 서있는 국보 나원리 5층 석탑 경주지역은 신라시대의 3층 석탑이 대부분인데, 흰색5층 석탑이 강 건너 여기 외따로 떨어져 있다. 국보 39호이다. 탑 전면에 넓고, 펀펀한 잔디밭이 조성되어 탑 주변 경관이 시원하고 편안하다. 아마도 잔디밭과 앞쪽에는 금당이 있든 자리인 것 같다. 탑은 전당후탑 형으로 2중 기단위에 5층 탑신과 5개 옥개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신라 41대 헌강왕때 여기에 국운창달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난원사(蘭原寺)란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절 앞에 소(沼)가있고 주변에 난초가 자라, 난원사라고 했다는 데, 지금은 그 흔적이 없고, 탑 옆에는 근간에 지은 작은 절이 있다. ▶흠과 결실이 없는 수려한 외모의 「나원백탑(羅原白塔」 탑의 높이 약 9.7미터, 흰색 화강암으로 짓고, 이끼가 끼지 않아 항상 순백으로 보인다. 신라 8괴중의 하나인 나원 백탑으로 불리는 이유다. 파손. 결실이 없으며,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군더더기가 붙지 않은 황금비례형의 듬직한 신라불교의 걸 작품이라고 한다. 탑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파편 글씨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주지역에서 흔치 않는 미(未) 도굴 탑으로, 해체수리 시(1995. 11-1996,7) 3층 옥개석 윗부분에서 사리함과 금동 작은 탑 및 작은 금동불상이 발견되었고, 부처님 진신사리 15과와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와 천년이 넘도록 본래의 색이 변하지 않는 탑, 그래서 국보급으로 품격이 높은 모양이다.
▶탑 주변에 최근 지은, 나원사(羅原寺) 주변이야기 탑 왼편 아래쪽에 작은 사찰, 나원사가 있다. 이 절 공덕비(라원사 공덕비)에, 경주 북쪽 10여리에 신라 41대 헌덕왕때 (809)대각사가 국운 기원을 위해 이룩한 절이 난원사(蘭原寺)라고 했는데, 세월이 흘러 그 절은 없어지고, 이 절 (나원사)은 1975년 1월15일 박도식. 허일금이 지었다고 적혀있다. 본당 1채, 종무소1채, 딸랑 2채뿐이다. 마당에 큰 백일홍나무가 벌거벗은 가지만 잡고, 찬바람에 떨고 있다. 여름이면 붉은 꽃들로 그득해, 절 마당이 현란하게 어울렸을 법한데-. 지금은 너무 적적한 겨울 절간이다.
다행이 본당 앞에 세워놓은 두 조각상 때문에 주변이 다소 여유와 유머가 있다. 하나는 뚱뚱한 넉살좋은 포대화상(布袋和尙)이 불룩한 뱃살을 내밀고 파안대소하는 모습이요, 그리고 그 좌측에 왼손으로 빈 바루(식기)를 들고, 뭔가 먹고 싶어 찡그리며 오른 손으로 머리를 긁는 전진 난만한 까까머리 동자상이다. 부족함이 있는 반면 여유로움도 함께하는 세상, 그게 바로 사바세계임을 암시하는 듯 둘의 모습은 대조적으로 절손님에게 잔잔한 미소를 선사하고 있다. 한적한 절을 찾은 불자들에게 무료함을 달래주려고 배려한 주지스님의 따스한 내공으로 보인다. 나원리 마을에서 여기까지 자동차 1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꼬불꼬불, 좁은 사이길 인데도 잘 올라왔다는 생각이 든다. ▶나원리 계탑마을 이야기 나원리 동편에 계탑(개탑)이란 데가 있다. 일명 개탑[犬塔]마을 이라고도 한다. 냇가에 신라시대 때 탑이 있었는데 어느 홍수 때 떠내려갔다고 한다.
약 350여 년전 이 마을에 큰 홍수가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이 물난리를 피해 마을 뒷산 높은 산봉우리로 피신한 후, 마을을 내려다보니 큰 개 한 마리가 물살에 쓰려지려는 탑 주변을 뱅뱅 돌며, 멍-멍 마구 짖어 대는 게 아닌가? 성난 듯 슬픈 듯, 탑을 구해달라고 구조를 요청하는 울부짖음 이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로, 끝까지 탑을 지키다 탑이 무너지면서, 거기에 깔려 죽고 말았다.
불교에서 탑은 부처의 유골이나, 유품을 모셔두고, 숭배, 공양하기위해 만든 신성한 석물로, 바로 부처님을 상징한다. 부처님을 살리기 위해, 사람 대신 죽었다고 「의로운 개」로 칭송하였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죽은 개의 영혼을 위해 산기슭에 개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고, 마을 이름도 개탑으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신라시대 「계탑(溪塔)」이 개탑[犬塔]으로 바뀐 것이다. 서북쪽 산기슭에 자세히 찾으면, 개 무덤이라고 전하는 돌무덤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