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해도동 소금밭[염전] 이야기 포항고속버스터미널 근방은 1930년대 우리나라 동해지역에서 유일한, 유명한 소금밭(염전)이었다. 형산강 제방을 쌓기 전 섬마을이었던 해도동과 송도동 일대는 염전 지역과 갈대밭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바닷가 해도동은 저습지대로 자연스럽게 소금밭이 형성되어 생계수단으로 이용되었고, 이곳 소금은 빛이 곱고 윤이 자르르 생긴다하여 “금산동(金山洞)”이라고 했고 어전 진상품에 속했다고 한다. 이곳 소금은 불을 때서 수분을 증발시키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제조되었는데, 서해안 천일염에 비해 원가(원료비)가 비싸고 생산량은 적었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지만 바닷가에서 살다보니 자연적인 환경에 의해 소금 굽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곳을 형산강 하류의 ‘섬동네’라 해서 ‘섬안’이라 하였고, 따로 떨어진 섬이라 ‘딴섬’ 또는 ‘해도’라고 불렸으며, 또한 바닷가에 가깝고 염전이 형성되어 ‘염전마을’이라고도 했다. 포항의 명산물로 형산강 부조장터를 통해 널리 알려졌던 재래식 소금이 서해 천일염에 밀려 자취를 감추고 말았지만, 1961년까지 약 8만여 평 염전에 1500~2000가마니 정도 생산되었다고 하며, 약 20여 가구 주민이 여기에 종사했다고 한다.#포항 산유국의 꿈 이야기 포항, 경주 해안 지역은 퇴적층 지형으로 예부터 고전(古典)에 기름 부존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전해온다. 1970년대 들어 경제 발전의 원동력인 석유의 필요성이 절대적인 상태에서 이 지역의 어느 곳에선가 기름의 징후를 갈망하고 있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1975년부터 비밀리에 포항 인근에 민간 업체의 명의로 시추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형산강 인근의 해도동 시추공 중 1개에서 지하 1200여미터 지점에서 원유처럼 보이는 시커먼 액체를 뽑아 올렸다. 드럼 1개 정도의 소량에 불과했으나 현장 채유팀이 1975년 12월초 총리에게 보고하게 되었으며, 그 즈음 마침 청와대 중동지역 수출대회의장에서 대통령이 이를 언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1976년 1월 15일) 대통령이 중앙청 연두 기자회견장에서 석유의 채굴을 공식 발표하였다. 우리나라도 산유국이 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회견장은 흥분했고, 뉴스를 보던 국민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만세”를 불렀으며, 전국은 들떠 ‘우리도 산유국’이라고 외쳤다. 포항 해도동은 갑자기 사람, 차량, 구경꾼들로 붐비고, 포항지역 땅값, 주가 폭등은 물론 온 시내가 북적거렸다. 그러나 그 후, 전문기관에서 이 기름의 성분검사 결과, 원유가 아니라는 판단이 나오고, 경제성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정부는 시추 발표 1년 7개월 만인 1977년 8월 11일 당시 대통령 하계 휴양지에서 포항지구 석유개발은 희망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나라 산유국의 꿈은 사라지고, 석유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때 그 시절 석유가 나온다고 야단법석을 떨던 이 지역 해도동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금은 자동차들만 쌩쌩, 어디가 어딘지 어림잡을 수도 없다. 벌써 45년이 지났다.#포항 대잠동 기찻길 공원 GAS 분출 이야기 옛 포항 효자역에서 그때 (2017년 3월) 시민공원 조성 공사시 지하 200여 미터에서 천연가스가 불길에 싸여 치솟았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몇 십 년 전 해도동 석유 시추 해프닝을 생각하면서도 혹시 석유가 솟지 않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지질전문기관의 조사결과, 석유는 아니고 가스양도 10여년 정도의 적은 양으로 결국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포항시는 약 1억원을 들여 이 GAS를 관광차원의 불꽃으로 만들어 시민공원의 볼거리로 만들었다. 당시 굴착장비, 철망들을 안내판과 함께 진열했고, 불꽃 주변을 투명 방열유리로 둘러 놓았다. 그리고 포항시의 무궁한 발전을 상징하는 ‘불의정원’으로 이름 지어 잘 보존하고 있다. 때때로 이곳 주변을 산책하면서 이곳이 언젠가 이루지 못한 형산강, 포항, 경주 지역의 도시산업용 천연자원의 보고(寶庫)가 되어 주길 기대해본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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