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박물관 신라 역사관에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란 작은 돌이 보물1411호로 진열돼있다. 길이가 약 32센치, 윗부분 너비 12.5센치의 돌인데, 모두 74자의 한문 글이 새겨져있고. 밑으로 갈수록 좁아져있다. 신라시대 두 젊은이의 맹세를 새겨놓은 돌로 전한다. 경주에서 이 보물의 모형 돌로 4개가 더 있는데 동국대 경주켐퍼스에 1개, 근처 「화랑마을」에 3개, 모두 근처 석장동에서 형산강을 바라보고 서 있다. ▶두 젊은이의 면학과 충성을 서약한 맹세의 돌 이 돌에 적인 한자 5줄 74자의 내용은 우리나라 역사학자인 고 이병도 박사의 뜻풀이에 따르면 ‘임신년 .6월16일 두 사람이 함께 하늘에 맹세하는 바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지켜나가고 과실이 없기를 서약한다. 만일 이 맹세를 어기면 하늘에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만약 나라가 편치 않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국가에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또 앞서 신미년 7월22일에 맹세를 했던 즉, 시, 상서, 에기, 전을 차례로 습득키로 맹세하는 데 기간은 3년으로 하였다’ 즉 이 돌은 신라의 두 젊은이가 화랑도 정신에 입각, 학문을 익히고, 국가에 충성할 것을 서약한 내용을 작은 냇돌에 새긴 것이다. 이 비가 새겨진 시기는 학자에 따라 다르나, 대개 신라 24대 진흥왕 때(552)나, 26대 문무왕 때(612)중 하나 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무튼 국난을 예상하고 국가에 충성할 것을 서약했다는 점에서 3국 통일을 지향하든 신라시대의 어느 임신년(壬申年)으로 보여 진다. ▶경주 석장사지 근처에서 일본인이 발견한 금석문 냇돌 이 돌은 1934.5 일본인 오사까 긴따로(경주박물관 근무)씨가 현곡면 석장사지 근처에서 발견하고 박물관에 가져와 수집함에 넣어 두었던 것을 이듬해 12월 일본 역사학자(스에마스 야스카즈)가 박물관에 와 이 돌을 보았다. 보통돌이 아님을 직감하고 판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임신년에 서약한 글이 새겨진 돌로 보아 비석 이름을 「임신서기석」으로 지었다. 그리고 이듬해(1936) 경성제대 사회학지에 ‘경주 출토 임신서기석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탁본과 함께 논문을 발표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오사카 개인이 소유하다, 해방이 되면서 경주박물관에 이관, 보물로 지정됐다.▶경주 화랑마을에 있는 임신서기석 모형돌 이야기 경주 석장동에 2018년 10월 화랑마을이 개원 운영되고 있다. 신라 화랑정신을 되새겨 국가에 바람직한 글로벌 신(新) 화랑육성을 목표로 만든 문화촌이다. 전시관, 국선장, 무예수련장등 화랑에 관한시설이 대부분이다. 이곳 전시관2층 한쪽 벽에 임신서기석 모형돌 2개가 서있다. 길이2 미터쯤 되는 큰 것과, 보물 실제 크기 마한 작은 모형 돌이 유리상자속에 들어있다. 이곳은 당시 화랑이 지켜야했던 세속오계중 「교우이신(交友以信)」정신을 강조하는 공간으로, 그에 대한 설명과 모범적인 화랑들의 사례를 영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전설적인 화랑, 사다함과 무관랑의 이야기 이곳 관람실에 상영되고 있는 삼국사기 「열전」사다함 편에 있는 이야기이다. 신라 사다함과 무관랑은 어려서부터 생사를 같이하기로 하고 화랑이 된다. 대가야국과의 전쟁 때 사다함은 15세의 나이로 비장이 되어 출전하였고, 큰 공을 세우고 개선장군이 되어 귀국한다. 진흥왕으로부터 많은 농토와 200여 명의 가야국 포로들을 노예로 하사받는다. 그러나 그는 노예를 양민으로 풀어주고, 전답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준다. 사다함이 공을 세우는 동안 친구 무관랑은 몸이 아파 화랑다운 역할을 못하다가 병으로 죽고 만다. 사다함은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울며 날을 세운다. 결국 벗이 죽은 지 7일 만에 17세의 젊은 나이로 그를 따라 세상을 떠난다. 당시의 젊은 신라 화랑들이 신의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만큼 서로 우정과 의리에 투철하였다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임신서기석도 이와 유사한 모범적인 좋은 실존사례이다. 화랑마을 풍월정 앞에 있는 모형돌 1개는 5~6미터 크기의 거대한 것으로, 동산에 우뚝 서서 멀리 형산강을 바라보고 있다. 동국대 켐프스의 모형돌은 1984년 12월 동국대 학생회관 준공 때 세웠는데, 학생들이 두 화랑과 같이 우정과 의리를 지키며, 학문에 전념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큰사람이 되자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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