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변 현곡에서 대구행 국도를 따라가면, 우측에 소현 마을이 보이고, 그곳 마을 회관 앞에 이르면 신라시대 효자, 손순(孫順) 유허지가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은 물론, 근간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모범 효자 사례로 소개됐었다. ▼거목들에 둘러싸인 손순 유허비 이야기 유허지 주변은 대부분 300-400년 된 회화나무와 팽나무 고목들로 둘러싸여 고색창연하다. 작은 팔작기와지붕의 비각 안에 서있는 비에는 ‘신라효자 문효공 손순유허비’라고 한문으로 적혀있다. 효자 손순에 대한 이야기가 삼국유사(5권, 효선편)에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손순이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여의고, 품팔이로 아내와 같이 가난한 살림을 꾸려나간다. 그러나 어머님만은 극진히 봉양하는 효자였다. 어느 날 어린 자식이 노모가 먹는 음식을 빼앗아 먹는 걸 보고 크게 상심한다. 아내에게 ‘자식은 또 낳으면 되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을 수 없으니, 자식을 땅에 묻어 버리자’고 차마 부모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한다. 취산 북쪽에 올라 아이를 묻으려고 땅을 파자, 기이한 석종(石鍾)이 종소리를 달랑거리며 나온다.  부부는 놀랐고 괴이해, 잠시 나무위에 걸고 두드려 보니 그 소리가 매우 은은했다. 아내가 ‘우리가 이종을 얻은 것은 아이의 복이 아니겠느냐?’ 고하며, 아이를 묻지 말라는 하늘의 뜻으로 생각하고 아이를 안고 도로 집에 내려왔다. 이종을 집에 매달고 날마다 종을 치자 그 소리가 궁중에까지 들리면서 왕이 종소리의 연유를 알아보게 한다.  왕이 손순의 효성에 감동하고, 옛날에 「곽거」라는 사람은 아들을 땅에 묻자 하늘에서 금솥이 내려왔다고 하는 데, 지난 세상의 효도와 후세의 효도를 함께 보는구나’하면서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집 한 채를 하사하고, 매년 쌀 50석을 주기로 한다. 그 후 손순은 살던 집을 시주하여 절을 짓고 절 추녀에 석종을 걸어 놓았는데 도적들이 훔쳐 갔다고 전한다. 이 비문은 조선 말기 학자인 성재 허전(許傳)이 지었다고 하며, 1970년에 손씨 문중에서 다시 세웠다고 한다.  ▼효자 손순의 위폐를 모신 「문효사(文孝祠」이야기 손순이 자기 집을 희사하여 「홍효사」란 절을 짓고 종을 안치하였는데, 진성여왕 때 후백제의 도적들에 의해 종을 도난당했다고 한다. 지금은 손순의 집터인 유허지만 남고, 그 안에 「문효사」란 팔작 기와지붕의 3칸 사당이 자리하고 있고, 거기에 손순의 위폐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낸다. 이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 (홍효문)옆에 ‘시조 문효공 유적보존회 기적비’라고 쓴 큰 표지 비석이 주위를 압도하며 서있다. 이곳은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15호로 지정돼있다.▼소현리 효자거리 마을에 천연색 타일벽화 유허지 근방에는 소현 마을 전설에 관한 옛 모습들이 천연색 타일로 벽화돼 있는 것이 특이하다, 신라시대 왕, 화랑 등 유명 선인들의 모습, 소현리 유래와 주변 지형 및 산봉우리들, 말, 호랑이 등 동물들이 모자이크돼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이 타일장식은 동국대 김호연 교수와 그 제자들이 가마에서 직접 구워 부쳤다고 한다. 손순이 살던 당시 이 마을주변과 사람들의 활동상을 표현 하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 ▼효자 손순유허지가 경주 관광명소로 등장 이 마을은 두 선녀가 손을 맞잡고, 마을을 품안에 안고 있는 듯 한 지형이라고 한다. 안태봉을 중심으로 좌우 구미산과 금곡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옛날에는 손순의 이름인 순우정을 따서 「순우정 마을」로 불렀다고 하는 데, 경주시내에서 보면 모범적인 효자마을이, 너무 작게 보인다고 해서 소현리(小見里)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지금 한적하든 이 시골 마을이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마을 벽에 알록달록한 벽화거리가 조성되면서. 경주의 새로운 관공 명소로 등장하고 있다. 손순의 효행과 효자마을의 역사를 널리 홍보하여 좋은 관광지로 돋보이게 하려는 것 같다. 일반 관광객은 물론, 특히 학생과 부모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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