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느려터진 폭염시계가 애잔히도 9월을 불러오는 시간을 더디게만 만들던 것도 어느덧, 불어오는 바람에 선뜩하게 느껴지는 냉기가 온 몸을 감싸 도는 9월의 끝, 여름날의 폭염시계로 멈춰 져 있던 경주경찰의 문화 탐방이 다시 시작 되었다. 불어오는 9월의 바람 속 냉기가 몸을 휘 감아 움츠려 있던 몸이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동아리 회원들의 따뜻한 웃음과 반가움으로 이내 날아가 버리고 몸에 따스함을 품은채 오랜만의 탐방을 시작한다.
이번 탐방의 장소는 선덕의 자취가 남겨져 있는 분황사와 황룡사지다. 경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는 게 부끄러울 정도로(물론 타지생활로 10년 정도 경주를 떠나 있었다는 핑계를 대 보기는 하지만) 분황사와 황룡사지는 나에게 있어서는 지금까지도 ‘학창시절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지나치던 삼거리 오른쪽에 있던 3층짜리 석탑이 남아있는 절, 거길 좀 더 지나면 항상 신호가 걸려 집으로 가는 시간을 늦추던 사거리 오른쪽에 있는 9층짜리 목탑이 있었다던 절의 넓디넓은 터’정도의 인식이 전부였다. 물론 이번 탐방을 끝낸다고 하더라도 그 인식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경주사람이지만 처음 가보는 분황사 입구를 지나 절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를 지나는 찰나 문뜩 스쳐가는 이유모를 향기를 뒤로하고 어수선한 인파속으로 파묻힌다. 이윽고 시작된 해설사의 분황사에 대한 설명, 탑이란 부처님의 무덤, 그 안에 모셔진 진신사리와 법신사리, 그리고 분황사의 유래……. 진즉에 알고 있던 삼국유사의 모란꽃 설화가 분황사의 이름을 짓는데 이어져 있다는 사실에 기억 저편에 있던 조각들이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간다.
모란꽃 그림을 보내온 당태종이 자신을 향기 없는 꽃으로 비하하는 것을 알고 보란 듯이 사찰이름을 분황사(芬皇寺, 향기로운 임금이 세운 사찰)로 명명하면서 자신의 자존심, 아니 난 고집이라고 말하고 싶은 강단을 보인다. 그 고집 때문이었을까? 당시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던 황룡사가 현재는 그 터만을 남긴 채 황룡사지로 전해 내려오는 것과는 다르게 선덕의 고집 속에서 분황사는 아직까지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 모습이 유지되어 이어오고 있다. 처음 분황사 입구를 지나치면서 맡은 이유모를 향기도 분황사에 남아있는 선덕의 고집을 무지한 나에게 알려주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선덕의 고집을 뒤로하고 오롯이 난 오솔길을 향해 간 곳은 서두에 말했던‘항상 신호가 걸려 집에 가는 버스의 도착을 늦추던’ 그 사거리 오른쪽에 남아있는 넓디넓은 절의 터 황룡사지이다. 그 엄청난 규모를 자랑이라도 하듯 절의 터라고 남아있는 넓은 터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세차게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터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확인하고 싶었던 내 바람과는 다르게 조금 더 걸음을 재촉하여 도착한 곳은 황룡사지 옆에 새워진지 얼마 되지 않은 “황룡사 역사문화관”이었다.
문화관 내에서 황룡사에 대한 3D 영상, 1/10 크기로 축소하여 만들어 놓은 황룡사 9층 목탑,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목탑 설계의 구조와 비밀, 황룡사지에서 나온 역사적 유물들에 대한 설명 등등……. 그러나 난 여전히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관에서 들은 설명 보다는 오솔길을 걸어오면서 맞은바람 속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이 자꾸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작년 5월, 부산청에서 경북청으로 청간 이동을 하면서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된 이동에 마음속 불안과 공허가 많이 남아있었다. 마침 부처님 오신 날 어머님께 이끌려 간 사찰에서 기도를 드리는 어머님 몰래 혼자나와 등을 달면서 이런 글을 쓴 기억이 난다.
“지금 내가 한 이 선택이 잘한, 옳은 선택 이였기를 바랍니다.” 평소 종교를 믿지 않는 나지만 이때만큼은 나도 모르게 종교에라도 의지해 보고 싶었을 만큼 불안이 컷던 모양이다.
선덕도 그렇지 않았을까? 자신의 선택 하나하나가 나라의 생과 사를 가를 만큼 중요한 선택이고, 매시간 매순간 그 선택을 해야 하는 최초의 여왕이 가지고 있던 불안과 공허를 엄청난 규모와 찬란함을 자랑했던 황룡사에 의지하면서 애써 감췄을 것이다. 선덕의 불안과 공허를 감싸주었던 황룡사가 훗날 몽고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어 남아있는 그 절터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느껴지는 선덕의 공허가 더 애잔하게 느껴진다.
“역사는 이어져 있고 중첩되어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어느 역사가의 말인지 혹은 어떤 유명한 인사의 말인지 모른다. 또 그 누군가가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번 탐방을 마무리 하면서 나 혼자만의 자의적 해석으로는 ‘과거 누군가의 남김이 현재에 있는 누군가의 생각으로 이어지고, 또 현재 누군가의 남김이 미래 누군가의 생각으로 이어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중첩되고 이어진다.’라는 의미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분황사에 남겨져 있는 선덕의 고집, 황룡사지에서 불어오던 바람 속에 남겨져 있던 선덕의 공허함, 그 속에서 현재의 내가 돌아보는 과거……. 이런 이어짐에는 무언가의 남김이 있어야 할 듯 싶다. 거국적인 역사를 위한 남김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작은 남김(좋은 남김이든, 그렇지 않은 남김이든 불문하고)이 필요할 듯싶다. 그런 의미에서 가을은 무언가를 남기기 참 좋은 계절이리라.
경주경찰서 경무과 경장 김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