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0일 금요일 문화탐방동아리의 세 번째 탐방 장소는 김유신장군묘와 무열왕릉이다.
첫 번째, 두 번째 탐방 모두 날씨가 좋지 않았는데 이번 탐방은 화창한 봄 날씨로 모두 기분 좋게 탐방을 시작했다.
경주 초임 발령을 받고 10년 여 동안 김유신 장군묘는 몇 번 가봤지만 무열왕릉은 한 번도 못 가본 곳이다. 평소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경주의 너무나 많은 유적지로 인해 그냥 똑같은 무덤으로 생각하고 흘려버리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오늘의 탐방장소인 김유신 장군묘와 무열왕릉...... 어떤 연관이 있을까?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김유신 장군묘 입구에 있는 길라잡이 안내서를 통해 김유신 묘는 사적 제21호, 무열왕릉은 사적 제 20호인 것을 보고 일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혼자만의 생각을 했다.
김유신 장군묘 가는 길에 금산재라는 칼국수 집으로 갔다. 넓은 마당과 아름다운 경치를 품은 고택이었다. 너무 아름다운 풍경으로 인해 칼국수가 절로 넘어 갈 것 같았다. 해설사로부터 이곳이 김유신의 재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배를 든든히 하고 김유신 장군묘로 걸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왜 김유신은 묘라고 할까? 라고 의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무덤에는 능(陵), 원(園), 묘(墓), 총(塚), 분(墳) 이라는 각각 다른 이름을 붙인다고 하는데,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무덤, ‘묘’는 능과 원을 제외한 왕족 및 군의 무덤, ‘총’은 왕릉으로 추정되지만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없는 무덤, ‘분’은 주인공도 모르고 특징도 없는 무덤을 말한다고 한다.
김유신은 신라 시대 왕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묘라고 하는 것이다.
김유신장군묘에 들어서니 신라의 어느 왕릉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과연 장군의 무덤이 맞는가’ 두 눈을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김유신(595~673)은 아버지 김서현과 어머니 만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고 멸망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이다. 신라에 투항하면서 신라의 진골이 되었지만 외조부가 어머니인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아버지인 서현과 혼인을 반대한 것에서 보듯이 가야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귀족은 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김유신은 성골 남성이 한명도 남아 있지 않아 성골 여성이 왕위를 잇고 있는 상황에서 진골 신분인 김춘추와 힘을 합쳐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고 판단해 여동생 문희와 김춘추를 연결해 주려고 했다. 문희와 김춘추의 만남을 통해 결혼 전 아이를 가졌지만 김춘추는 결혼을 주저하고 있고 선덕여왕의 도움으로 결혼을 하게 된다.
이후 김춘추는 외교를 담당하고 김유신은 국방을 담당하면서 삼국통일의 위엄을 달성하는 견인차가 됐다.
김춘추가 무열왕이 된 후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백제를 병합하고, 이어 문무왕 때 고구려를 병합했으며, 당나라 군사까지 물리쳐 ‘태대각간(太大角干)’ 이라는 관작을 받고 뒷날 흥덕왕 때에는 ‘흥무대왕’으로 추봉되기도 했다.
설화로 신라 36대 혜공왕 무렵 김유신장군묘에서 회오리바람이 일어 바람 속에 말을 탄 장군과 40여 명의 병사들이 미추왕이 묻혀 있는 죽현능 안으로 들어가자 장군의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고 한다.
“신이 한평생 나라를 위해 충심으로 이 나라의 평화를 위해 애 썼는데 지금 왕의 방탄함으로 자손이 무고한 죽음을 당하고 있으니 이 나라를 떠나겠다”고 하자 미추왕이 “장군이 이 나라를 떠난다면 불쌍한 백성들은 어찌 되겠소, 부디 이 신라를 지켜 주시오”라며 그 간청을 거절하여 다시 회오리바람이 김유신장군묘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혜공왕이 듣고 김유신 장군묘에 백배 사죄를 하고 사악한 귀신이 못 들어가게 십이지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 설화에서 보듯이 신라에서 김유신의 영향이 상당했던 것 같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29대 왕인 무열왕릉이다.
김춘추(604~661)는 25대 진지왕의 손자로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임금이자,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진 왕이다. 김춘추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은 방탕한 생활로 왕이 된지 4년 만에 폐위가 됐는데 이로 인해 김춘추는 쉽게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그래서 김춘추가 왕이 된 데에는 김춘추의 뛰어난 외교능력과 그 뒤에 김유신 장군의 군사력이 있었다. 김춘추는 선덕여왕 11년 백제군에 의해 자신의 사위와 딸의 죽음을 보고받고 군사 지원 요청을 하러 고구려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후 당나라로 가 군사 지원 약속을 받는 등 정치가로 기반을 다졌다.
선덕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화백회의에서 상대등인 알천이 왕위를 사양해 김유신을 등에 업은 김춘추가 29대 무열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당나라 군대와 연합해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은 완수하지 못했다. 그리고 당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복식, 무덤 앞에 비석이나 상석을 세우는 것 등 당나라 문물을 받아들였다.
이때 들어온 문물로 신라 시대 최초로 세워진 비석이 무열왕릉 좌측에 위치하고 있는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이다. 비석에는 거북모양의 받침돌과 용을 새긴 머릿돌만 남아 있는데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이 새겨있어 무열왕릉 무덤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받침돌인 거북의 모양을 보면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신라인의 진취적인 기상을 잘 보여주고 있고 머릿돌 좌우에는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세 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번 탐방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영향을 미친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을 알 수 있는 뜻깊은 자리였다. 신라인의 숨결이 살아 있는 경주에 살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번 탐방을 마무리 한다.
이재우 경사경주경찰서 생활안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