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기운이 가득한 11월의 어느 화창한 날, 가을바람의 차디찬 공기가 온 산을 물들여 색이 예쁘게 변한 단풍과 나뭇잎으로 가득했던 풍경을 만끽하며, 며칠간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만 보다가 맑은 하늘을 보며 오다보니 어느새 오늘의 문화탐방 장소, 천년고도 신라의 삼국통일 위업을 달성한 문무왕의 발자취가 남겨져 있는 감은사지에 도착했다. 감은사는 바다와 멀지 않은 경주시 양북면에 위치한 절로 지금은 넓게 자리 잡아있던 절의 흔적만 남아 있어 처음 마주한 감은사지는 나에겐 황량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온 나에게는 신라와 관련된 내용은 역사책을 통해서 배우고 익힌 내용이 전부였기에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수도 경주는 웅장하고 화려함이 가득한 곳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이렇듯 단순히 역사책을 통해서만 경주에 대해 보고 배운 나였기에 감은사지의 첫 모습은 어찌 보면 황량한 느낌을 줄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감은사지에 들어서며 주변에 있던 표지판에는 감은사터와 삼층석탑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감은사는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지금의 장소에 절을 세우기 시작하여 아들인 신문왕 때 완성한 절이다. 문무왕이 처음 짓기 시작한 절... 문무왕은 경찰이 되어서 처음 대구를 떠나 경주에 왔던 나에게 가장 특별한 왕이었다. 친구들과 경주 보문단지에 놀러 왔던 어린시절.. 경주의 많은 왕릉을 보며 ‘신라의 왕들은 모두 저리도 높고 웅장하게 자신의 권위를 마치 자랑이라도 하려는 냥 서로 경쟁하는 듯 짓는 구나. 저 능을 짓지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력과 시간이 들었을까’하는 생각을 했지만 문무왕이 잠든 문무대왕릉(수중릉)은 그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여 동해에 뿌려 죽어서도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는 뜻을 품은 왕, 그런 문무왕이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를 막겠다는 생각으로 동해 바닷가에 짓기 시작한 감은사 터에 지금 내가 와있다는 생각을 하니, 처음 느꼈던 감은사지의 황량했던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고 들판이 넓게 펼쳐진 터에서 ‘이곳에 절을 짓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문무왕은 어떤 느낌이었을까’혼자 잠시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남아있는 감은사 터에는 감은사 동탑과 서탑이 우뚝 자리 잡고 있고 있는데 가까이서 얼핏 보기에도 커 보이는 이 탑들은 현재 남아있는 경주의 삼층석탑 중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석탑 안에서 사리함도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석탑의 크기만큼이나 내부공간도 제법 클 것으로 예상되었다. 석탑 옆으로는 넓게 금당 터가 펼쳐져 있는데 금당의 바닥부분에는 옆으로 놓인 큰 받침돌 위에 장대석이라 불리는 돌을 올려놓아 그 아래는 빈 공간들이 있었다. 이 공간은 신라를 지키고자 용이 되겠다는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라고 하는데 문무왕의 아들이자 효심이 지극한 것으로 알려진 신문왕이 감은사를 완공하면서 부왕을 생각하여 만든 공간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감은사지 주변으로 잔디가 깔린 바닥에 둥근 돌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돌들은 감은사를 지을 때 회랑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회랑이란 사원을 지을 때 주변을 둘러싼 지붕이 있는 긴 복도를 말하는데 건물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만약 지금도 감은사가 터만 있는 것이 아닌 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정말 웅장한 모습이지 않았을까? 처음 감은사지를 마주했을 때 받았던 첫 느낌은 조금 실망감을 안겨주었을지 모르지만 터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탁 트인 시야와 맑게 게인 하늘과 살짝살짝 살결에 닿는 차갑지만 시원했던 바람, 내겐 조금 특별했던 문무왕이 이 곳 나와 같은 곳에 서서 느꼈을 기분을 상상하니 감은사지를 떠나는 발걸음에도 석탑과 터만 남아있는 이 장소를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죽어서도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다짐을 한 문무왕... 그 문무왕이 쉬어가는 이곳에 또 발길이 닿을 듯하다. 신라문화탐방동아리 순경 김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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